"죽기 전 배상" "면죄부 안돼"..대위변제, 징용 피해자 엇갈렸다

정진우, 박현주 2022. 6. 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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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현금화 시한폭탄' 어떻게 멈추나 [上]

정부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으로 대위변제에 무게를 두는 것은 명분과 실익을 확보할 수 있고, 일본과의 협상이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우선 2018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이 배상을 외면하며 지연되고 있는 사법 정의를 정부 주도로 실현한다는 상징적 명분이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 국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 절차가 중단되면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외교적 실익도 얻을 수 있다.

대법원은 2018년 11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5000만원, 유족 1명에게는 8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일본이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며 배상 책임을 외면함에 따라 사법 정의 실현이 지연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여기서 전제는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들의 동의다. 향후 구상권을 청구하는 장치가 마련된다 해도, 피해자들 입장에선 일본 기업이 내야 할 배상금을 왜 한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실제 피해자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본 결과 법원 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의 배상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쪽부터 방식을 따지지 않고 빨리 보상받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쪽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일본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①“죽기 전에 배상받고 이젠 끝내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신영현 할아버지는 96세다. 그는 "이제 지칠대로 지쳤다"며 "일본 기업의 배상금이든 한국 정부가 주는 돈이든 문제가 마무리될 수 있다면 이제 이 싸움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신영현(96) 할아버지는 1943년부터 약 3년간 일본의 탄광과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이후 70여년이 지난 2016년 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가족 99명과 함께 강제 노역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섰다. 신 할아버지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가 인간 대접도 못 받으면서 일한 게 억울해서라도 꼭 배상을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 정부 주도로 대위변제가 이뤄진다면 이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신 할아버지는 “이제 지칠대로 지쳤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소송이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일본 기업의 배상금이든 한국 정부가 조율해 대신 주는 돈이든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가 될 수 있다면 이제 이 싸움을 그만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신 할아버지는 또 “대위변제든 지원금이든 한국 정부가 노력을 한다면 많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억울함이 조금은 풀릴 수 있지 않겠냐”며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피해자가 살아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신 할아버지는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 이외에도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해 반성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상금도 주지 않는 일본이 이제 와서 우리에게 사과하거나 사죄하진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국 정부가 일본을 설득하고 피해자를 위로해줬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면서다.


②“대위변제가 ‘화해의 길’ 될 수 있길”


박상복(왼쪽 셋째)는 대위변제 자체에 대해선 찬성한다면서도 "돈을 주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다그치는 식이라면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박상복(77)씨의 부친 고(故) 박남순씨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 군수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중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피폭 피해까지 입었다. 수년간의 강제노역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 받았다. 박씨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전쟁 범죄인 강제징용 문제에 사과 한 마디조차 없는 일본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지만, 그보다 한국 정부가 뻔뻔하게 피해자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 더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7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고, 1·2심을 승소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소송에는 박씨를 포함해 총 14명이 참여했는데, 법적 다툼이 길어지며 당초 소송에 참여했던 피해 당사자는 모두 숨을 거뒀다. 박씨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각종 서류를 끌어모으고 소송에 나서는 동안 한국 정부는 책임을 외면한 채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랬던 정부가 혹시라도 대위변제를 통한 해법 마련에 나선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반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 정부가 주도해서 주는 돈을 받으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지 말라거나 소송을 취하하라고 하는 등 요구조건이 있지 않겠느냐”며 “돈을 주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다그치는 식이라면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적극성을 보여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이 이뤄지는 것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배상이 ‘화해의 길’로 이어질지 아니면 피해자를 우롱하는 입막음이 될지는 배상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일본의 태도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③“돈만 주고 끝? ‘역사의 죄인’ 될 것”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이철권씨는 “현실적으로 상당수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은 배상금 수령을 가장 큰 목표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하지만 강제징용 문제는 피해자와 유족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이기 때문에 단순히 돈으로만 환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정부의 속내는 알고 있지만 왜 강제징용 피해를 당한 한국이 전범국인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방안을 마련해 대신 배상하고 일본 기업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막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동원 문제해결고 대일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뉴스1]

이씨는 “강제징용이라는 아픔과 이를 대하는 일본의 파렴치한 대응은 역사적으로 기록해야 할 부분”이라며 “한국 정부가 졸속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돈을 언제 줄지, 얼마를 줄지 이런 건 관심도 없고 그 돈을 받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어 “우선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정서적 접근이 필요하고, 강제징용 피해 사실과 그에 대한 해법을 역사적으로 기록해 우리 자식과 손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일본 기업 대신 한국 정부가 주도해 마련한 방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할 경우 나중에라도 일본의 전범 기업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며 “말로는 배상금을 대신 지급한다고 하면서 정작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덮고 넘어가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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