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왕따의 암울한 표식"..러 104년만에 '국가 부도의 날'

윤상언 2022. 6. 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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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앙은행의 전경. [사진 러시아중앙은행 홈페이지 캡쳐]

러시아가 ‘국가 부도의 날’을 맞았다. 달러화와 유로화 채권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졌다. 러시아가 외화 표시 이자를 갚지 못한 것은 1918년 이후 104년 만이다. 미국 등 서구의 경제 제재로 달러화 의존도가 줄어든 만큼, 디폴트로 인한 러시아 경제의 충격은 제한적일 전망이다. 다만 서방의 제재 수위가 연일 높아지며 경제 정상화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까지 외화표시 국채 이자 1억 달러(약 1300억원)가량을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맞았다. 해당 국채 이자 지급일은 지난달 27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못했고, 이날까지 부여한 30일의 유예기간에도 이자를 갚지 못한 것이다.

블룸버그는 "이번 디폴트는 해외 채권자에 대한 지급 통로를 폐쇄한 서방의 강력한 제재의 정점을 찍은 것"이라며 "러시아가 경제적, 금융적, 정치적 '왕따'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암울한 표식"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외화채권을 갚지 못해 디폴트에 빠진 건 1918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104년 만에 처음이다. 당시 혁명 주도세력이던 볼셰비키가 차르(황제)의 빚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1998년에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을 선언했지만, 이는 약 400억 달러(약 51조4000억원) 규모의 루블화 표시 국채가 대상이었다.


104년 만에 처음으로 갚지 못한 외화 채권…경제 제재 영향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국가 부도를 맞았지만 채무불이행에 대한 러시아와 채권자의 입장은 엇갈린다. 러시아는 상환 의무를 완료했다는 입장이다. WSJ은 이날 익명의 채권자를 인용해 "러시아 정부가 국제예탁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자 대금을 달러화와 유로화로 송금했지만, 제재로 인해 해당 자금이 동결되면서 유로클리어가 개별 투자자 계좌로 자금을 입금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올해 초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가해진 서방의 경제 제재로 채권자에게 돈이 가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의 대형 은행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퇴출당하면서, 해외은행 등에 예치된 6302억 달러(약 808조7400억원·지난 1월 말 기준) 규모의 외환보유액에 접근할 길이 막혔다. 채권 이자 등을 투자자에게 보내기도 어려워졌다.

지난 3월에도 러시아가 경제 제재로 인해 달러 표시 채권의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왔지만, 미국이 채권이자 상환에 따른 외화 송금을 예외로 두면서 디폴트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러나 미 재무부가 지난달 말부터 이러한 예외조치를 중단하면서 채권 이자 상환을 위한 달러화 등의 송금 길은 완전히 막힌 상태다.


“디폴트, 상징적인 수준”…그러나 앞으로는 ‘첩첩산중’


26일 독일 엘마우성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다만 이날 국가 부도가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전망이다. 블룸버그도 이날 “러시아의 디폴트는 상징적인 수준의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각종 제재를 받아온 데다, 그동안 달러화 등의 의존도를 줄여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에너지 수출 대금은 달러화가 아닌 루블화로 받고 있다.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러시아는 올해 막대한 무역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의 무역 흑자는 2500억 달러(약 321조)를 기록해 지난해(1200억 달러)의 배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타티아나 오를로바 옥스퍼드 이코노믹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에너지 가격 강세로 현재 상태에선 러시아가 당장 (외화) 자금을 빌릴 필요성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방 국가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수위를 높여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경제 정상화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특히 국제 유가가 하락할수록 러시아의 경제도 궁지에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주요 7개국(G7) 정상은 이날 독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정해진 가격을 넘는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제한하는 것이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 러시아 제품을 거래하더라도 유가 상승을 막기 위한 조치다.

러시아산 금에 대한 수입 제한도 발표될 전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G7과 함께 러시아에서 금 수입을 금지하는 방안을 공표할 것”이라며 “금은 러시아에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게 하는 수출 자원”이라고 밝혔다.

윤상언 기자 youn.san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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