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난민 대표로 왔어요" 8200km 날아온 태권청년

송지훈 2022. 6. 2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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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출신으로 요르단 아즈락 난민 캠프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태권 청년 와엘 알 파라즈. 김성룡 기자


“한국에 건너오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장거리 여행이라 피곤했지만, 서울에 도착하니 새로운 힘이 솟네요. 높은 빌딩과 많은 사람들, 여기저기 초록색으로 덮인 서울의 풍경이 신기합니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서소문 세계태권도연맹(WT) 본부에서 만난 시리아 출신 태권도 선수 와엘 파와즈 알 파라즈(20)는 자신을 ‘태권도 덕분에 새 삶을 찾은 난민’이라고 소개했다. 23일 강원도 춘천에서 개막한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와 29일 이어서 열리는 코리아 오픈에 연이어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 세계에 전쟁, 질병, 기아 등으로 1억 명이 넘는 난민이 있다는데, 그들을 대표해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시리아 출신으로 요르단 아즈락 난민 캠프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태권 청년 와엘 알 파라즈. 김성룡 기자


알 파라즈는 시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내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난민이다. 가족(부모님과 6남2녀)과 함께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은 끝에 지난 2014년 요르단 국경지대 아즈락 난민 캠프에 정착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난민 청소년 알 파라즈의 삶을 바꾼 건 태권도였다. 지난 2016년 태권도박애재단(THF) 태권도시범단이 아즈락 캠프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알 파라즈는 “시범단원의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에 매료됐다”면서 “종목 이름조차 몰랐지만, 멋진 발차기를 하고 하늘을 붕붕 나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 운동을 배우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회상했다.

요르단 아즈락의 난민 캠프에 마련된 태권도 아카데미.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WT와 THF가 손잡고 아즈락 캠프에 태권도 아카데미를 열면서 그의 태권도 인생이 시작됐다. “커다란 트럭이 태권도 매트와 도복을 잔뜩 싣고 캠프에 도착했다. 용품 하차 작업을 지시하던 아시프 아흐마드 코치가 구경하던 나를 불러 ‘도와달라’고 부탁한 그 순간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됐다”는 게 알 파라즈의 설명이다.

난민 캠프 태권도 아카데미 1기로 도복을 입은 알 파라즈는 수련생 중 가장 먼저 검은 띠를 땄다. 2단을 거쳐 현재는 국기원 공인 3단이다. 2018년부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장학금을 받으며 태권도를 연마하고 있다. 알 파라즈는 “태권도를 배우며 체력적으로 강해진 점도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내 삶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라면서 “태권도를 통해 난민 커뮤니티에서 존재를 인정받게 됐다. 난민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할 때 중재하는 게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알 파라즈는 "태권도의 아름다움을 정확한 동작으로 보여주고 싶다"며 여러 차례 촬영을 다시 하는 열의를 보였다. 김성룡 기자


한국까지 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리아 여권을 가진 난민인데 요르단 정부의 비자를 받아야 하는 ‘경계인’이었기 때문이다. WT와 THF의 중재로 요르단 정부를 설득해 간신히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조정원 WT 총재는 “3자 회담에서 ‘알 파라즈를 전 세계 난민 캠프의 희망으로 만들자’고 설득했다”면서 “한국에서 태권도의 정신을 체험한 알 파라즈가 전 세계 난민 커뮤니티를 아우르며 평화의 전도사 및 태권도 홍보대사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알 파라즈의 한국행을 도운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왼쪽에서 두 번째)가 연맹 본부를 예방한 알 파라즈와 코칭스태프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알 파라즈의 목표는 2024년 파리 올림픽 출전이다. 지난해 IOC의 배려로 도쿄올림픽 예선(남자 80㎏급)에 나섰지만, 전자호구와 8각 경기장 등 올림픽 태권도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배를 마셨다. 알 파라즈는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과 코리아 오픈(이상 -74㎏급 출전)이 올림픽 방식에 적응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지만, 최선을 다해 경쟁을 펼치겠다. 우선 1승부터 시작해 꿈을 높여가겠다”고 다짐했다. 난민대표 자격으로 출전한 그는 두 대회에서 국기 대신 WT 엠블럼을 가슴에 달고 뛴다.

요르단 아즈락의 난민 캠프에서부터 한국까지 8200㎞를 날아온 알 파라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 세계 난민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알 파라즈는 “나는 태권도를 통해 꿈을 꿀 기회와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며 “난민 신분이 됐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게 아니다. 이 순간에도 좌절감을 느끼는 많은 난민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알 파라즈는 2024년 파리올림픽에 출전해 전 세계 난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게 목표다. 김성룡 기자

■ 와엘 파와즈 알 파라즈

「 이름 : Wael Fawaz Al Farraj
출생: 2002년 8월10일 시리아
현 거주지: 요르단 아즈락(Azraq) 난민 캠프
체급: -74㎏급(올림픽은 -80㎏급)
소속: 난민대표팀(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 등급: 국기원 공인 3단
주요 이력:
● 2021년 도쿄올림픽 예선(요르단 암만)
● 2022년 UAE 후자이라 오픈
● 2022년 아시아선수권, 코리아 오픈(이상 춘천)

■ 아즈락 난민 캠프 태권도 아카데미

요르단 아즈락에 위치한 시리아 난민 캠프 내 태권도 아카데미 전경.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 2016년(캠프 내 임시 공동 건물)
확장: 2018년(휴메니테리언 태권도 센터 완공)
운영 주체: 태권도박애재단(THF), 세계태권도연맹(WT)
수련 인원: 난민 4만 여명 중 매년 100여 명 규모
유단자: 6살 여자아이 포함 28명 배출

송지훈 기자 song.ji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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