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화의 선구자가 죽기 전 남긴 말
[김형순 기자]
▲ K1관, 주로 60년대 초기작 유영국 유화 작품 |
ⓒ 김형순 |
이번 전시는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절제된 조형, 강렬한 원색, 기하학적 구도의 그림을 통해 그의 예술사적 성취와 정수를 보여준다. 그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이용우 객원 큐레이터를 초청했다. 이용우 큐레이터는 현재 홍콩중문대학 문화연구학과 교수다. 그는 유영국이 유학 시절 '탱고 보이'였다며 그의 추상화를 보면 왠지 '모리스 라벨'의 음악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 K2관, 주로 60~70년대 유영국 유화 작품. 이용우 큐레이터는 작가적 정체성을 '색(Colors)'에 초점을 맞췄고, 아카이브, 가족사 사진 등을 통해 인물 유영국 더 친근하게 부각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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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영국 화백은 누구인가? 그는 식민지 격동기인 1916년 경북 울진에서 선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 동네 사람들 다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부자였다.
그는 경성(서울)으로 올라가 '제2교보(경복고 전신)'를 다녔고 4학년 때 반장을 했다. 당시는 군국주의 식민시대, 일본 담임이 그에게 학기 말, 동급생 중 문제성 학생 명단을 요구하자 그런 밀고를 거절했고 결국 학교를 자퇴한다. 이에 큰 수치심을 느낀 것 같다. 유영국 아들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설명이다.
▲ K1관, 유영국 '작품' 101.5×81cm 1961(왼쪽), 130×89cm 1966(오른쪽) |
ⓒ 김형순 |
유영국은 일본으로 가 요코하마 상선학교를 진학하려 했다. 자퇴 문제 등으로 거절당하자 결국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미술공부를 하기로 한다. 그는 일본에서 국적이나 출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도쿄 문화학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동갑인 이중섭도 만났다.
이 학교는 군국주의 시대임에도 자유로운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별천지였다. 이 대학 일본인 창립자 니시무라 이사쿠의 교육철학은 확고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군국주의 위세가 너무 세 이 학교도 끝내 폐교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일본 전위미술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 독립미술협회, 신조형예술그룹 등에서 활동했다.
시각적 다변성에 호기심 많았던 그는 1942년부터 일본 '오리엔탈 사진학교'에서 수학했고, 사진 콜라주를 통한 신조형을 탐구해 후에 산과 자연에서 앵글 구도를 추출하는 방식을 설정하는 데도 도움을 받는다. K2관 2층엔 그가 1942년에 찍은 경주 사진도 소개된다.
▲ 1963년 '상피울루비엔날레' 도록 |
ⓒ 김형순 |
유영국은 1947년 김환기의 초청으로 서울미대에서 강의했다. 1948년 '신사실파'에 가입해 활동하다 6.25 전쟁이 나 가족 부양을 위해 또 사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타고난 화가였던 그는 성공적 사업에도 만족하지 않고 창작을 재개했다.
그는 1955년 서울 약수동으로 이사와 본격적 그림을 시작한다. 1957년엔 홍대에도 출강했다. 1960년 국전이 너무 보수화되자, 현대미술가연합(1960)을 만들고 신상회(新象會, 1962) 등에서 활동했다. 제2회 모던아트협회전' 참가 후 서울대도 그만둔다. 그만큼 작업이 중요했다. 본격 국제화 시대인 1963년, '상피울로비엔날레'에 출품했다.
추상의 가능성 연 영원한 '모던보이'
▲ 유영국 일본 유학생 시절 30년대 전반기 사진 |
ⓒ 유영국 미술문화재단 |
20세기 한국 추상화의 유영국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갔다. 현대미술의 새 가능성을 열어줄 추상회화를 믿었다. 그가 특히 주제로 삼은 대상은 산이다. 산에는 '점·선·면·형·색' 등 우주 만물의 모든 요소가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근대정신인 논리적 사고과 과학적 사유, 기하학적 조형을 추가했다.
유영국은 작품이 팔린다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 열정적이었고 구도자적이었다. 그래서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고, 물감이나 캔버스 등 재료도 넉넉지 못한 시기라 많이 그릴 여유도 없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라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돈이 너무 많아도 그림을 못 그린다"며 돈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 유영국 '작품' 유화 130×195cm 1963 |
ⓒ 김형순 |
그런 와중에 그의 최고(emergence) 색채가 나왔다. 달관과 초월의 경지인가? 그의 색채는 안정된 구도 속 강렬하고, 환상적이고 원초적이고 웅장하다. 게다가 음악적이다. 그의 말대로 심포니 같은 것이 들려온다. 그는 "색채란 써보면 참 재미있는 거요. 옆에 어떤 색을 가져와야 이 색도 살고, 또 이 색도 살고 또 그림이란 게 그래요"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 1990년대에도 전성기 1970년대 못지 않은 고품격 작품이 나왔다. 그는 노년이 되어도 흥분이 더 필요하다며 "요즘 난 그림 앞에서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가 겪은 '식민·해방·전쟁·분단·냉전' 등 시대고를 추상에 녹여 이상적 세상을 추구했다.
▲ 유영국 '작품' 유화 32×41cm 1977. 단순한 형태 속 유화의 재질감을 살리다 |
ⓒ 김형순 |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난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책 <방구석미술관>)
유영국 국제갤러리 전시장 사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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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https://www.kukjegallery.com/ 입장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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