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전 부총리 영전에] 르네상스맨의 부활을 기원하며

2022. 6. 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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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추도사
지난 달 스승의 날 전후에 『경제학 원론』의 공동저자들이 조순 전 부총리의 서울 봉천동 자택을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조 전 부총리와 제자들의 마지막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영식 서울대 교수, 전성인 홍익대 교수, 조 전 부총리,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사진 정운찬 이사장 제공]

케인스 소개했지만 그 틀에 안주 안 해


학자 이전에 치국평천하 꿈꾸던 경세가


열정, 실사구시 정신은 귀감으로 남을 것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조순 박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르네상스맨이 사라졌다. 시와 서에 능하고, 사서삼경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섭렵하였으며, 현대 경제학의 큰 물줄기를 만들었던 케인스, 슘페터, 하이예크의 진면목을 이해했던 학자였다. 강릉의 모옥(茅屋)에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으며 경세제민을 다짐하였고, 봉천동 자택인 소천서사(少泉書舍)에서 『경제학 원론』을 집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출사해서는 국사와 민생을 돌보았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과, 일촌광음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근면은 일생의 좌우명이었고, 학문적 깨달음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사구시는 그가 추구한 궁극적 목표였다.

조 박사의 학문적 관심의 폭과 깊이는 필부가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때때로 편협하고 정형화된 인식의 틀 속에 그를 가두려는 사람들의 빗나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케인스라는 위대한 경제학자를 소개하고 그 생각을 추종하는 케인시언들을 제자로 길러냈지만, 정작 당신은 케인스의 틀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 박사는 중요한 경제학 고전을 후학들이 직접 섭렵하여 원저자의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를 반추할 것을 강조했다. 대우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후학들과 『아담스미스 연구』, 『존 스튜어트 밀 연구』 등의 학술서를 출판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과정의 ’화폐금융론 특수연구’라는 세미나 과목에서는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의 『물가와 생산』, 크누트 빅셀의 『이자와 물가』, 아더 루이스의 『경제성장론』, 조셉 슘페터의 『경제발전론』 등 경제학의 주옥같은 고전들을 동료 교수들 및 박사과정 재학생들과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들 경제학자 가운데 여럿이 당대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케인스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조 박사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을 케인스로 축소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다. 일반인들은 조 박사를 ‘관악산 산신령’으로 불렀지만 조 박사의 지적 깊이, 학문적 열정 및 유연성에 감명받은 후학들은 그를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해리 G 존슨을 본떠 ‘해리 G 조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 박사는 학문을 단순히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파악했다. 이런 의미에서 조 박사는 학자이기 이전에 치국과 평천하를 꿈꾸는 경세가였다. 조 박사의 고향인 강릉의 고택 앞에는 커다란 입석이 2개 서 있다. 그 입석에는 준도행기 봉천수명(遵道行己 奉天受命)이라는 조 박사의 친필 휘호가 각인되어 있다. 도를 따라서 몸을 행하고, 하늘을 받들어 명을 받는다는 뜻이다. 조 박사가 상아탑을 떠나 공직으로 향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짐작케하는 글귀다.

경제학자로서 국가 재무를 총괄했던 케인스나 슘페터처럼 그도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면서 당신이 수학한 것을 현실에 적용하려 노력했다. 토지 공개념과 중앙은행 독립성 등은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정책 방향이었다. 최초의 민선 시장으로서는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참사를 수습하고, 당산철교를 신축했으며, 콘크리트 정글이던 여의도의 5·16 광장을 상업적으로 개발하자는 압박을 뿌리치고 오늘날의 여의도 공원으로 보존하는 뚝심을 보였다.

이제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열정과 성심 그리고 실사구시의 정신은 우리들에게 계속 귀감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총리

※정운찬 이사장은 평소 스승인 조순 전 부총리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글에서 ‘님’을 쓰는 건 과공(過恭)이라는 스승의 뜻에 따라 추도사도 ‘박사’로 표시했다. 최근에 발간한 스승과의 인연을 담은 책의 부제도 ‘조순 선생과 함께한 5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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