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좋은 엄마, 나쁜 엄마.. 이런 구분이 쓸모없는 이유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50쪽
내겐 '엄마'라는 이름이 그랬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라는 이름의 밑그림은 한정적이었다. 아이를 향한 무한한 사랑, 가족에게 헌신하는 삶,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다정하고 자애로운 존재. '좋은 엄마'로 주어진 배역을 해내고 싶었지만 '좋은 엄마'와 '자연스러운 나' 사이에 혼돈이라는 골짜기가 깊어져 갔다.
혼돈에 맞서 삶에 질서 부여하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 또한 자신에게 닥친 혼돈 앞에서 질서를 찾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이후 그녀 내면엔 '무의미'라는 커다란 공백이 자리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혼돈에 뒤흔들리면서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무엇, 무의미한 삶을 밀고 나갈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그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한 분류학자가 저자를 사로잡았다. 수줍고 어리숙했던 소년에서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자 세상의 무수한 물고기에게 이름을 붙인 유능한 과학자로 변신한 사람.
인생을 바쳐 분류한 표본을 지진으로 상실하고도 포기를 몰랐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는 슬픔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 저자는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연구를 지속하며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었던 근원이 무얼지 궁금했다.
데이비드는 물고기를 분류하여 생명이 흘러가는 방향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류 진보를 위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분류 체계는 사다리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인간이 있었다.
그는 물고기라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서 한 발 나아가 인간을 더 우수하게 만들겠다는 열망으로 미국에 우생학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인간 풀(pool)을 확장하고자 '부적합자'(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 - 183쪽)를 분류하고 그들을 강제 불임화하는 정책 도입에 일조했다.
식물을 사랑하고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이름 붙이길 좋아했던 상냥한 소년이 우월한 유전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편협하고 폭력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무얼까.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다윈의 진화론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으로 변이와 다양성을 칭송했던 반면, 데이비드는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믿었고 다양성을 제거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혼돈을 뚫고 나갈 열쇠를 얻고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파헤치던 저자는 자신이 기대었던 희망을 버려야 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하지만 거기, 절망의 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경이를 발견하게 된다. 데이비드가 도입한 우생학 정책으로 '강제' 불임수술을 받은 애나를 만나면서. 애나와 메리가 서로 공유하는 삶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삶의 의미는 '연결'에 있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226쪽
삶의 의미는 데이비드가 말하는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생명 사이로 뻗어 나가는 다양한 '연결'에 있음을 저자는 깨닫는다. 위계와 질서를 부여하는 세계가 아니라 혼돈 속에 우연한 만남으로 연결되고 만들어지는 작은 그물코, 그 그물코가 짓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물망이 지구를 지탱한다고.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찾아 해매던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우주에서 한 점에 불과한 인간은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자연과 생명체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그물코를 지으며 인간은 서로를 살리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
저자는 진위 발견을 위한 도구인 과학을 활용해 삶의 진실을 발굴해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다윈, 캐럴 계숙 윤이라는 과학자들의 발견을 자기 삶의 구비구비와 연결하면서, '무의미'라는 내면의 커다란 구멍을 메우고 경이를 되찾게 되는 책의 후반부 이야기는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그 경이는 새롭게 찾아낸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 안에 존재했으나 우리 눈이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이분법적 언어가 그은 선 너머에서 너울거리고 있다고. 저자가 과학과 삶에서 어렵게 발견한 진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에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쾌한 문장이 가슴에 남는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268쪽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그게 족쇄가 되어 삶을 옥죄었던 때가 있다. 엄마라는 자리를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는 사이 역할과 의무만 남고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사라졌다. '좋은 엄마'라는 범주를 깨고 '나다운 엄마'면 충분하겠다고 받아들이기까지 혼돈과 좌절, 절망의 시간을 지났다.
나를 위한 선택과 아이를 위한 선택, 모두를 위한 선택 사이에서 줄다리기한다. 다만 예전보다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 집안이 어지럽혀지고 아이의 끼니와 목욕을 챙기지 못해도 안절부절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로 빼곡했던 종이를 치워버리고 그때그때 아이와 보내는 느슨하고 유쾌한 시간을 즐기려 한다.
그러느라 아이에게 사과하는 일이 늘었고 종종 아이가 엄마를 챙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좀 부족하면 어때', 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나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해 준다. 엉성하지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우리만의 그물망을 짓는 것 같다. 책의 저자처럼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264쪽)라는 걸 배워가면서.
인생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었던 저자는 질서라는 커튼을 걷어내고 바라본 세상에서 새로이 그물 짜는 법을 배운다. 뜻밖의 아름다움과 따스함이 깃든 작지만 튼튼한 그물망을. 상상의 한계를 넘어, 이분법과 위계라는 커튼을 벗겨 삶의 경이로 나아가라고 격려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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