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중 이런 경지 처음"극찬..미대 원했던 김지하 마지막 그림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시인 김지하는 글씨와 그림도 특별했다. 1980년 출소 이후부터 난초를 그리기 시작한 시인은 이후 매화, 달마, 모란으로 옮겨갔다.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김지하의 그림은 단순한 먹장난이 아니었다”며 “김지하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성이 있는 그림”이라고 시인의 그림을 평가했다.
또 “후기에 그린 수묵산수화도 정말 아름답고, 추상 미술로 나아가는 경지”라며 “현대 동양 한국화가 중에 이런 경지는 못 봤고, 추사 김정희는 글씨를 잘 써서 그가 시의 대가라는 걸 잊었다고 하는데 지하는 시를 잘 써서 그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게 과소평가됐다”고 극찬했다.
취기에 인사동 카페 벽지에 쓴 시… 뜯어 보관한 도배지는 1000만원 낙찰
유 이사장은 시인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 글씨의 유사점도 짚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인데, 김지하의 글씨는 아주 예쁘고 힘 있는 글씨”라며 “강약의 변화가 있고 한 글씨 안에서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고의 글씨, 추사 김정희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묻어난다”고 설명했다.
시인은 1991년께 만취한 상태에서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 벽지에 평소 좋아하는 이용악의 시 '그리움' 전문을 적었다고 한다. 유 이사장은 “만취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내려썼는데, 어떤 꾸밈도 없는 글씨체에서 기백을 느낄 수 있다”며 “카페가 폐업한 뒤 이 시가 적힌 벽지를 누군가가 뜯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2년 전 서울옥션에서 서예박물관을 구상 중인 사람이 1000만원에 낙찰받았으니, 영원히 보존될 것 같다”고 전했다.
유홍준에 "'하로동선'쓰고 '너 나중에 크게 될 거다'"한 시인
유 이사장에 따르면, 시인의 초창기 난초는 아리따운 춘란의 형태였다. “‘난을 칠 때 세 번 굽어가는 것이 좋다’는 추사의 말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세 번 굽는 리듬을 준 것을 볼 수 있다”며 “이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난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수많은 기부 모금전에서 팔리며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시인은 난을 받는 사람에게 딱 맞는 화제(畵題)를 써서 전했다. 유 이사장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멋진 화제는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 선생에게 준 ‘털 빠진 꿩이 하늘로 훨훨 날아가듯이’였다. 임진택 명창에게는 ‘기축이 흔들린 후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다 담아내라’고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게는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화로에 겨울 부채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물을 지칭하는 문구를 써줬길래 지하형한테 한소리 했더니, ‘여름 화로도 겨울이 되면 쓸모가 있고, 겨울 부채도 여름이면 쓸모가 있다. 너는 나중에 크게 될 거다’라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크게 됐나 싶다”며 농을 덧붙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난만 그리다 매화로…"난은 선비문화, 나와 맞지 않아"
김지하는 똑바로 선 ‘정난’은 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늘 기우뚱하게 바람에 흩날리는 난을 그렸다. 유 이사장은 “김지하 난의 획은 오묘하고 가녀리고 심지어 에로틱하게 뻗어 나간다. 본인은 ‘묘연(妙延)’이라고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묘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2003년 이후 매화가 등장한다. 유 이사장은 “시인은 ‘난초는 선비 문화에서 난 거라, 나한테 본래 맞지 않고 감정이 실리지 않는데 매화는 기굴한 줄기에 가녀린 꽃이 핀 형상이라 감정이 잘 표현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미대 가고 싶었던 어린 김지하, 마지막 그린 그림도 뒤뜰 목단
시인이 동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2004년 이후 달마가 등장한다. 유 이사장은 “동학, 천도교가 시각적 이미지가 없어 민중에 퍼져나가기 어려운 종교인데, 시인은 ‘인식의 바탕은 불교의 망막으로, 실천은 동학의 눈으로 한다’고 하며 코믹한 생김새의 달마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유 이사장은 "시인의 마지막 그림은 목단(모란꽃)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림을 그려 미대에 가고 싶어했는데,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깨너머로라도 그림을 배우자는 생각에 미대 옆 미학과를 선택했다”며 “집에서 그림을 못 그리게 손을 묶으면 발가락으로 숯을 집어서라도 그림을 그렸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리고 싶었던 대상이 집 뒤뜰에 있는 목단꽃이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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