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 컸으니 소리도 컸겠지요" 빈소도 쓸쓸했던 김지하, 49일 뒤에야 이해받고 떠났다
"심술궃고 미운 데도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릇이 크니 소리도 컸겠지요"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인 25일, 2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그를 기억하고 보냈다.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에서 김사인 시인은 "심술궃고 미운 데도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릇이 크니 소리도 컸겠지요 (…) 그의 소신공양으로 우리는 한 시대를 건넜습니다"라고 추모시를 읊었다.
쓸쓸했던 빈소, "말년에 다른 모습, 오해가 많았다"
사회를 맡은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코로나19로 인해 김지하 시인의 장례를 원주에서 가족장으로 치르며 많은 분들이 조문하지 못했는데, 꼭 그 이유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며 "말년에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언행으로 감정을 상하고, 갈등을 빚고, 척지는 일도 있어 발걸음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오해도 있고,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리적 현상도 없지 않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쓸쓸히 보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문화제를 연 취지를 밝혔다.
이날 추모제에는 시인과 종교인, 환경운동가 등을 비롯해 배우 최불암, 화가 임옥상, 작가 문정희, 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자리했다. 시인의 소조상에 씌운 막을 걷어내며 시작된 문화제는 오후 8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도올 김용옥은 추도사를 통해 "우리에게는 T.S 엘리엇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 있었다"며 "'내가 누군데'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누군데'를 말하는 그의 푸념이 말년의 생애를 덮었다. 지하는 너무 고독했다"고 전했다.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 이후 정치적 발언으로 등 돌린 동료들
1991년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통해 죽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이후 그와 가까이 지내던 많은 동료들이 그와 거리를 뒀다. 이후 그 거리는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부분 좁혀지지 않았다. 함세웅 신부도 49재 참석 제안을 한 차례 거절했었다고 밝히면서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고 쓴 글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당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대자보가 강의를 나가던 대학에 붙은 걸 본 게 시인과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죽음은 화해의 과정이다. 김지하의 초기, 중기, 말기를 나눠서 평가해야하고, 김지하 시인은 천상의 전달자"라고 말을 맺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후 후배 문인들을 대표해 반박문을 작성했던 시인 김형수(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는 "민중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의 접경지에 있는 저희들은 그의 언어 한 마디 한 마디가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며 "생명운동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가는 길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됐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당시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2007년 전주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을 빼버린 게 마지막 기억인데 그 이후 다시는 뵌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며 조금 울먹이기도 했다.
유홍준 이사장은 "백낙청 선생을 일방적으로 비판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후 둘은 화해한 건 아니고 '김지하 선생은 병중이라 몸과 마음이 고통받고 있다'며 백 선생의 이해가 있었을 뿐"이라며 "백 선생은 '김지하의 문학사상은 한국문학사의 큰 자산'이라는 말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소설가 황석영은 "미디어와 출판사들은 뭔가 얻어가려고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말과 현실은 어긋나고는 했다"며,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뒤 주변에서 많은 비판에 시달린 시인을 두고서도 "김지하는 아픈 사람이고,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여러번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강한 정신과 섬세한 감성 요동치는 괴로운 인생" "그릇이 크니 소리도 컸다"
1970년대 김지하의 시를 일본에 알리고, 일본을 통해 전 세계 지식인 사회에 '김지하 구명운동'을 퍼뜨린 미야타 마리에 전 일본 중앙공론사 편집장은 서울에서 시인을 만난 기억을 떠올리며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저기가 서대문 구치소야'라고 말하며 웃던" 모습과, "종묘에서 누구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 뒤 '서대문 교도소 간수야, 많이 맞았어'라고 말하던" 모습을 전했다. 그는 "김지하 시인의 그 이상하지만 상냥함이 민주화 투쟁을 움직였다고 생각한다"며 "그 자상함으로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강한 정신과 너무 섬세한 감성이 요동치는 괴로운 인생이 아니었을까"라고 회고했다.
이번 추모제를 주도한 이부영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 추진위원장은 "지난 5월 8일 원주 빈소가 썰렁했을 땐 마음도 무겁고 슬펐다"며 "말년에 국민들 마음을 거스르는 일부 행위가 있었지만, 시인이 민주화 운동 초기에,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에게 제시했던 여러 화두를 생각하면 공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개인사 담은 회고록, 환경운동, 화가… '시인' 외의 김지하
시인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도 이날 동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시인과 대학때부터 친구사이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김지하를 그냥 보내기 너무 서운해서 책들을 다 모아놓고 읽어봤는데, 회고록 『흰 그늘의 길』 세 권을 자세히 다시 보게 됐다"며 "회고록에는 젊은 김지하의 실수, 증조할아버지가 동학에 쫓긴 이야기, 아버지가 공산주의 활동으로 고생한 이야기, 그래서 운동에 약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던 망설임의 감정이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적'이 너무 큰 정치적 광기를 얻은 뒤, 문단에서도 김지하를 비평적으로 검토할 여유를 잘 갖지 못했다"며 "지하는 '정치적으로 보지말고 문학 이론적으로 비평을 해줬으면 좋겠는데'라는 서운함을 가끔 얘기도 하고 쓰기도 했다"고 아쉬워했다.
1980년대부터 환경, 생명 등 사상을 고민했던 시인과 함께 생각을 나눈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은 "'환경운동연합'이라는 명칭을 만들 때도 상의했고, '환경은 생명이다'도 선배님과 논의 끝에 나온 것"이라고 전했고, 유홍준 이사장은 "김지하의 그림은 먹장난이 아니었고, 시를 너무 잘 써서 그림이 과소평가된 면이 있다"며 "추사 김정희처럼, 아무렇게나 쓰지만 법도를 지키는 세계를 난과 글씨로 명확히 보여줬다"고 그의 그림세계를 평가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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