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한 사람에 대한 수만가지 말..'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김유태 2022. 6. 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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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향거리 / 찬쉐 지음 /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1만7000원
찬쉐 [사진 제공 = 문학동네]
중국에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유명 신문사 '신후난바오(新湖南報)' 사장이었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란 이상을 따라 부모는 언제나 열성 당원이었고, 집안은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했다. 어느 날 부친이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 신문사도 집안도 박살이 났다. 아홉 식구가 '4평'짜리 집으로 쫓겨나야 했다. 어려운 살림에 아이도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뒤 선반 조립과 수레 운반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아이는 사실상 무학이었지만 서른둘 나이에 작가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날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급부상했다. 그의 이름은 찬쉐다.

녹다 남은 눈(殘雪·잔설)을 뜻하는 필명을 쓰는 그는, 현대 중국 아방가르드 문학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사조나 계파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만의 몽환적인 서사로 이야기하며 프란츠 카프카를 연상케 하는 찬쉐의 대표작 '오향거리'가 한국에 출간됐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작품 줄거리는 이렇다. 오향거리란 이름의 마을에 한 여성이 이사를 온다.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X여사'. 동네 사람들은 정체가 불가해한 그녀의 나이와 직업을 두고 말들이 많다.

누군가는 "몇 ㎝ 두께로 분을 발랐다. 목주름까지 전부 덮였다"며 그녀 나이를 50세로 추측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우물가에서 봤다"며 22세로 단언한다. 모두가 X여사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확인도 불가하다. 그녀와 남편이 살아가는 모습은 견과류 장수인데, 사실 X여사가 기관 간부였다는 설도 파다하다. 급기가 그녀는 이색분자, 모살 음모자, 교사범, 건달이었다는 소문까지 마을을 유령처럼 떠돈다.

이윽고 그녀는 오행거리의 최대 미스터리가 된다. 그러다 'X여사가 간통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나고, 사람들은 또다시 각자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어느덧 X여사의 진짜 나이가 몇인지, 그녀의 직업이 정말 간부였는지, 또 불륜을 저지른 게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다만 모호하면서도 이중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서의 한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이 겪는 한 사건을 배치한 저자는 관찰자를 자처하는 군중을 기록하면서 '재현'에 대해 질문한다.

결국 사실(事實)이란 각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재현(再現)일 뿐이라는 명제 말이다.

만화경과 부채에 대한 저자의 천재적 은유는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 등 뒤에는 최소 두 개의 그림자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더 많고. 그림자는 땅에 쥘부채를 펼쳐놓은 것처럼 서 있지요.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나요. 나는 아주 애써 실눈을 떠야지만 그 흩어진 그림자를 모을 수 있어요.'(222쪽)

'군중의 심리란 만화경 속 오색 유리처럼 미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45쪽)

저자가 제목에 심어둔 오향(五香)의 뜻도 의미심장하다. 오향이란 팔각, 정향, 회향, 계피, 후추 등 여러 향신료를 빻아 만든 맛과 향을 뜻한다. 이들 원재료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묻혀 사라지는 일 없이 끝까지 본래 맛과 본래 향을 유지한다. 오향거리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존재하는 장소, 곧 인간세계를 환유한다. 하지만 맛과 향이란 본디 사라져버릴 한시적 감각이란 점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허무를 결말 삼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으로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실과 군중'을 고민한 찬쉐는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X여사를 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찬쉐는 이번 책 한국어판 서문에서 '인간'이 소설 주제라고 말했다. "제가 다룬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소연과 갈망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 감정사를 구성합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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