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장' 거부하고 걸어간 해직교사의 길
[김광철 기자]
▲ 31사단을 이전한 곳의 대나무 숲길에서 5월 4일 아침, 김민곤, 김광철 <우리교육> 기획·편집위원이 장권호 선생과 함께 대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
ⓒ 김광철 |
지난 기사 '숲을 가꾸는 한국의 부피에 교사 장권호'( http://omn.kr/1zffx )에 이어서 이번 기사에선 교사로서의 장권호의 삶을 살펴본다.
장권호 선생은 섬진강이 휘감아 돌아 흐르는 전북 남원 대강면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로 전학해 금호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유신이 한창이던 시절 장 선생은 정치와 사회문제와는 담을 쌓고, 학교와 도서관과 집을 오가면서 학교 공부에 열심이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일도 열심히 했던 학생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자 교수의 추천으로 1981년 2월부터 사립학교인 순천상고 교사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당시 순천상고는 전수학교였다. 이 학교는 교사들에게 기부금을 받고 채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 전교조 <광주교사신문> 장권호 선생은 첫학교인 순천상고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 신문, 교지 등을 펀집한 경력을 활용하여 전교조 광주교사신문에서 충주적인 역할을 맡아 종이 신문이 마지막 출간할 때까지 함께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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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이사장실로 불려 가 학교 신문을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때부터 장권호 선생은 가는 학교마다 학교 신문과 교지 제작은 그의 몫이었다. 1999년부터 2021년 퇴직할 때까지 전교조 광주지부 기관지인 '광주교사신문'을 20년 간 발행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광주교사신문'은 언론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2021년 6월까지 발행했던 것들을 모아 100호 영인본과 201호에서 226호까지 묶은 마지막 영인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모교인 광주 금호고에서 전교조 해직교사의 길을 가다
▲ 장권호 선생이 나무 묘목을 키우는 농장의 농막에서 취재 차 들른 김민곤, 김광철 <우리교육> 기획, 편집위원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숲가꾸기와 학교 생활, 전교조 활동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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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장 선생님을 전교조의 해직 교사의 길로 이끌었나요?
"명문 사학이라고 하지만 학생들이 일류 대학에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일반 학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어요. 교사들이 야간 자율학습의 감독이나 하면서 경쟁 교육에 내몰리는 현실을 대하게 되자, 이런 교사들이 마치 양계장 주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18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와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자연스럽게 교사협의회와 전교조에 가입을 해서 교육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됐지요.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금호고가 속해있는 죽호학원에서 17명의 교사들이 해직을 당하는데 그 대열에 동참을 한 것이지요. 그 후 11월까지만 해도 학교 측에서 전교조를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오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끝내 뿌리쳤지요."
- 해직을 각오할 때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대책은 있었나요?
"특별한 대책도 없었어요. 어머니도 모시고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아파트 공사장에서 문짝을 짜는 일을 했어요. 6개월 정도 하다가 그것도 겨울이 되니 일감이 없어져요. 그때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크고 잘 나간다는 광주의 대성학원에서 강사로 들어오라고 해 고민 끝에 학원 강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요.
학원에서는 잘 나가는 1타 강사였어요.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에는 서울대 반 담임을 맡기도 했지요. 수입은 괜찮았지만 몸은 말이 아니었어요. 수업에 들어가면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수업 준비를 했지요. 1시간 수업 로드맵을 그려 구상을 하고, 심지어 판서할 때는 어떤 색깔의 분필을 써야 할지까지 고민했지요.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학교가 그리워지더라고요. 하루빨리 복직을 해서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참교육을 하고 싶은 마음이 나날이 커져만 갔지요."
▲ 장권호 선생과 전교조 활동을 했던 교육 동지들 김민곤과 김광철이 취재를 온다고 하여 장권호 선생 셋째 형님인 전교조의 장범호 선생과 전교조 전 광주 지부장 등이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전교조와 장권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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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가까운 해직 생활을 청산하고 학교로 돌아올 때의 심정은 어떠했나요?
"1994년 3월 2일 금당중학교에 발령이 나서 출근하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하얀 칼라에 자주색 교복을 입은 여중 2학년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맞아 주는데 숨이 막힐 것만 같았어요. 세상의 어느 꽃밭이 이보다 더 환할 수 있었을까요?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 한 번 바라보고 창 너머 금당산 자락의 연분홍 진달래 한 번 바라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국어책을 읽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어요."
지금이야 학교가 촌지나 업체들로부터의 리베이트 관행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학교는 온갖 비리와 부패가 만연했다. 학생들 우유 급식에 빌붙어 자기가 마신 우유 대금을 내지 않은 교장·교감, 수학여행 때는 당연한 듯 리베이트를 받아 챙기는 교사들, 반 성적을 올리기 위해 OMR카드를 빼돌려 부정행위를 하는 교사가 우수 교사로 표창 받는 현실 등 전교조가 바꾸고자 했던 학교는 크게 개선된 것이 없이 여전했다.
민족, 민주, 인간화의 참교육을 외치면서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는 학교를 바꿔 내려고 교직을 걸고 싸웠지만 학교 현장은 별로 바뀐 것이 없는 현실에 실망감은 컸다. 그렇다고 학교로 돌아온 장 선생은 현실에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 전교조 해직교사 백서 발간 장권호 선생은 과거 '전교조 광주교사신문' 편집장 등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결력을 살려 광주를 대표하여 전교조의 '해직교사 배서' 발간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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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뀐 것이 거의 없는 학교 현장을 바꿔내기 위하여 어떤 싸움을 어떻게 하였나요?
▲ 2017년 11월 10일, 당시 운남고에 근무하던 장권호 선생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많은 명사들을 초청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당시 <오마이뉴스>의 오연훈 대표도 초청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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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생은 복직 이후 금당중학교, 전자공고, 광주과학고등학교, 풍암고등학교, 금구중학교를 거쳐 2018년 8월 운남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그는 도서관과 독서교육 관련 부서에서만 일한다.
그는 단 한 번도 타 부서로 이동하지 않고, 그 흔한 부장 자리도 거부했다. 부장이 아닌 부서의 기획으로만 24년 5개월 동안 학교 일을 하다 교직을 마친다. 그렇다고 그는 일을 설렁설렁하지 않고 치열하게 했다. 도서관 운영 개선과 독서교육을 이야기할 때 장권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기사에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권호 선생은 주 52시간의 살인적인 수업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인식조차 없이 코피를 쏟던 햇병아리 교사였지만 명문 사학에서도 야간 자율학습이 여전한 현실을 보면서 참교육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결국 교사의 생명과도 같은 교단에서 끌려 나오고 생계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세우고자 했던 참교육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퇴임 후에는 숲을 가꾸는 교사로 거듭나 그칠 줄을 모른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동화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장권호 선생 이야기는 듣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 관련 기사를 읽은 많은 이들이 이런 장권호 선생을 '존경한다'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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