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저절로 가난해지는 세상
기름값은 언제 가장 쌀까. 정답은 ‘바로 지금’이다. 실제 휘발유값은 한 달 넘게 사상 최고가 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경유 가격은 올 들어 47%나 치솟았다. 그러니 매시간 기름값이 오르고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이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 포인트 인상)을 밟자 경기 위축 우려에 지난주 국제 유가가 급락했지만 이 역시 일시적이라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계속되고 있고, 연료 수요가 증가하는 휴가철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통상 국제 유가 변동이 우리나라 판매가에 반영되는데 2~3주가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기름값 고공행진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저물가가 장기화되는 디플레이션(Deflation)을 우려했었는데 어쩌다 고물가를 걱정하는 지경이 됐을까. 물론 우리나라에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전쟁, 중국 봉쇄 등이 촉발한 에너지·식량·원자재 가격 폭등은 전 세계적 골칫거리다. 당장 필요 없지만 가격이 오를 것 같아 미리 사두는 ‘가수요’까지 가세할 경우 물가 고삐를 잡긴 더 어려워진다. 전 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아파트값이 그랬다. 1인 가구 증가로 수요가 늘었지만 정부가 이를 간과하고 공급 늘리기를 게을리하자 아파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투기 수요에다 ‘벼락거지’를 면하려 한 ‘영끌족’까지 가세하면서 가수요가 폭발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다들 잘 알 것이다.
최근 상황은 더 심각하다. 식용유, 밀가루 등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 여기에다 물가방어용 금리 인상으로 국민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가난해지는 세상이 돼 버렸다. 몇 달 만에 딴 세상이 된 것 같다는 푸념도 들린다. 불과 3개월 전 대통령선거에선 자산 폭등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표심을 얻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함께 오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대한 우려가 없진 않았지만 그저 기우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후보들은 경쟁하듯 돈 푸는 공약을 앞세웠다. 윤석열정부도 출범하자마자 소상공인 손실보상 등을 위해 62조원을 푸는 화끈한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얼마 전까지 한국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3.1%로 전망했던 터라 정부와 정치권이 예측을 못했다고 탓할 순 없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경기가 위축되는데도 물가가 상승하는 나쁜 인플레이션을 막지 못하면 가난해지는 것을 넘어 가계가 줄줄이 파산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물가를 못 잡아 다른 나라보다 화폐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면 해외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전쟁 와중에 한국만 희생양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최근 상황을 복합 경제위기라고 진단하면서 ‘경제 전쟁의 대장정’을 선포했다. 적절한 판단이다. 안타까운 것은 동원할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일요일에 긴급회의를 열어 법상 허용된 최대한도로 유류세를 낮추기로 했지만 이 역시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다. 휘발유 차를 매일 40㎞씩 모는 소비자가 이 조치로 아낄 수 있는 게 한 달에 7000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부와 한국은행은 외부 상황 변화만 기대하지 말고 선제적이고 과감한 금리 결정과 재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한다. 고금리와 긴축정책은 투자를 위축시키고 채무 부담을 늘리며 실업률까지 끌어올릴 수 있어서다. 스태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197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취임한 폴 볼커는 당시 연 10% 수준이던 기준금리를 1년여 만에 20%까지 끌어올리는 강력한 통화긴축을 시행했다. 시중에 돈이 마르고 기업 부도와 실업자들이 늘면서 연준 건물로 시위대가 몰려와 군대를 배치해야 할 정도였지만 볼커는 긴축을 강행했고, 신규 유전 개발 같은 공급 측면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3년 후 인플레이션은 잡혔다.
끝으로 정책 입안자들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주문하고 싶다. 지금껏 잘못된 경제 정책들은 모두 비슷한 패턴을 보여왔다. 그릇된 자신감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실패가 명확해 보일 때에도 준비된 계획이 있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재앙은 찾아왔다.
한장희 편집국 부국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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