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팬덤, 얻는 것과 잃는 것

2022. 6. 1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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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의 정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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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팬덤이 주목받는다. 정치적 팬덤에 대해 여당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야당 의원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물망에 올랐지만 본인이 거부했던 유인태 전 의원이 라디오에서 “강성 팬덤이 자산일 수는 있지만 거기 끌려다니면 망하는 길”이라고 했다. 홍영표 의원 또한 “(강성 팬덤을) 이대로 방치하면 민주당이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을 보면, 민주당 내부에서도 팬덤 현상에 대해 ‘비로소’ 자각하는 것 같다.

이런 정치적 팬덤 현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됐고, 정치계에 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일까?

미국 저널리스트로 대안 언론 ‘VOX’를 창립한 에즈라 클라인은 최근 ‘Why we're polarized’라는 책을 냈다. 미국 정치의 양극화에 대해 다룬 이 책에서 클라인은 최근 50년간 미국인은 자신이 투표하는 정당을 덜 좋아하게 됐지만, 상대 정당은 더 싫어하게 됐다고 진단한다. 그 이유에 대해 적지 않은 수의 미국 유권자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당파적 정체성은 강해지지만, 당의 힘은 날로 축소된다고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치가 서포터스의 대결로 전락했다는 그의 진단을 통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정치적 훌리건이 미국 정치를 좌우한다는 의미다. 또한 클라인은 ‘돈을 벌 수 있는 방식이 정치를 바꾸고 있다’고도 진단한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소셜 미디어와도 관련 깊은 언급이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정치적 팬덤 현상은 깊은 관련이 있다. SNS 같은 매체는, 유권자에게 정치인을 더 친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과 ‘맞팔’을 할 경우, 자신의 언급에 대해 정치인이 반응해주는 것을 보면서 유권자는 해당 정치인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정치인 본인이 직접 글을 올리느냐, 아니면 비서진이 올리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권자가 해당 정치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인에게 친밀감을 느끼면, 그중 일부는 해당 정치인의 적극 지지층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SNS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인물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의 폭풍 트윗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잠도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보통 사람이 잠자는 데 쓰는 시간에 그는 트윗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SNS에 몰두했다. 덕분에 그는 미국에서는 드물게 열광적 팬덤을 갖고 있다. 트럼프를 보면 SNS와 팬덤 형성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 팬덤 형성의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정치의 인격화’라는 정치 문화다. ‘정치의 인격화’란 정치를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즉 정치인 중심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이런 정치 문화가 대세다. 일반적으로 ‘정치의 인격화’ 현상은, 정치 문화 속에서 국가 유기체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에서 나타난다.

국가 유기체론이란 국가는 생명체기 때문에 탄생과 성장 그리고 성숙기를 거쳐 노화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정치 문화적 사고(思考)를 의미한다. 국가 유기체론에서 군주는 생명체의 두뇌와 같은 존재이고, 국민은 국가라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라고 여겨진다. 때문에 국가는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자신을 구성하는 세포인 국민의 삶을 챙겨야 한다는 당위론이 도출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국가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존재가 군주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즉, 군주가 국가 자체가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런 문화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가부장적 군주를 바라는 심리와 정치를 인물 중심으로 파악하는 정치 문화가 자리 잡는다.

국가 유기체론적 정치 문화는 유럽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아시아에서는 유교 문화권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독일이나 프랑스 혹은 일본 같은 국가에서는 ‘정치의 인격화’ 경향이 존재는 하지만, 우리와 같은 팬덤 현상은 목도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권력 구조와 관련 깊다. 권력 집중 정도가 심한 대통령제에서는 ‘정치의 인격화’ 현상이 정치적 팬덤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지만, 내각제 혹은 권력 분산형 대통령제인 이원집정부제하에서는 팬덤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정치적 팬덤은 정치에서 긍정적인 존재일까?

일각에서는 정치적 관심도와 참여도를 증가시키기에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동의하기 힘들다. 현재 보수나 진보 진영의 정치적 팬덤은, 모두 합해봐야 전체 유권자 중 5%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 5%가 적극적으로 정치 과정에 관여한다 치더라도, 숫자로 볼 때 국민적 차원의 정치 참여도를 증가시킨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정치적 팬덤은 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팬덤은 정치를 ‘사람 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정치를 감성화시킨다.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할 정치를, 사람 중심으로 파악함으로써 정치가 감성화된다는 의미다.

감성적 영역에서는 객관적이고 논리적 근거 없이도 무엇이나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고, 이런 현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성적 영역은 ‘주관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 영역은 다르다. 정치적 지지는 반드시 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자신이 지지하는 특정 정치인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다른 주장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는 지지를 거둬야 한다. 또한 해당 정치인의 이념 혹은 노선만이 정치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성적인 태도가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당 정치인을 지지한다면, ‘정치적 지지’는 ‘특정인에 대한 추종’으로 변한다. 이렇게 되면 해당 정치인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나 정치 집단은 모조리 ‘적(敵)’으로 취급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사라진다. 정치는 본래 ‘타협과 협상의 기술’이다. 상대방을 적으로 돌려버리면, 그 상대는 타협과 협상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타도 대상이 돼버린다. 결과적으로 정치의 중요 구성 요소인 협상과 타협은 사라진다.

또한 정치적 팬덤이 기승을 부리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같음’을 강요하는 상황도 초래되는데, 이 역시 문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자신과 의견이 다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주장도 제도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반면 팬덤이 정치판을 지배하면, 의견이 다른 소수 혹은 다수의 목소리는 묵살된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된다. 민주주의란 본래 ‘정치적 다름’을 인정해 이들의 목소리도 제도에 반영하는 것을 기본 가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적 팬덤은 정치를 실종시키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니 걱정이 깊어진다. 팬덤은 결코 정치적 과정을 흥미롭게 만드는 ‘양념’이 아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4호 (2022.06.22~2022.06.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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