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과 마음 조선에 남겨 달라" 이런 유언 남긴 日형제 정체
"피곤에 지친 조선인이여. 남의 흉내를 내기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으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조선에 살던 일본인 임업기사이자 민예학자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는 자신의 책 『조선의 소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도자기를 연구하는 형 노리타카(伯敎·1884∼1964)의 뒤를 따라 조선에 온 그는 조선의 땅과 나무와 사람들을 사랑했다. 마흔 살에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며 "몸과 마음을 모두 조선에 남기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바람대로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는 조선 연구에 인생을 바친 '최초의 한류팬' 아사카와 형제가 태어나 자란 땅이다. 18일 주일한국문화원이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답사 프로그램 참가자 30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한국의 흔적이 녹아있는 일본 내 장소들을 찾아가는 이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년간 중단됐다가 이번에 다시 열렸다.
방문단이 처음 도착한 곳은 호쿠토시 다카네초(高根町)에 있는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자료관'이다. 다쿠미가 조선에서 쓴 열네 권의 일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국인 김성진 씨가 1995년 이를 호쿠토시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2001년 문을 열었다.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 관장은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은 한·일 우호의 상징적인 장소다. 코로나19로 관람객이 줄어들어 안타까운데 이렇게 찾아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자료관에는 형제가 당시 조선에서 접했던 풍경이 한국 도자기와 소반, 가구, 한복 등의 유품으로 재현돼 있다. 1913년 초등학교 미술 교사로 조선에 간 형 노리타카는 조선의 도자기에 매료돼 700여 곳이 넘는 전국의 가마를 돌며 '이조 도자기 요적 일람표'를 만들었다.
야마나시현립 농업학교를 졸업한 다쿠미는 1914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소 직원으로 근무하며 한반도 녹화 사업에 힘썼다. 동시에 조선의 공예품을 사랑해 당대의 민예 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교류하며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도 앞장섰다. "형제가 수집한 도자기와 공예품이 3500점이 넘었는데, 형 노리타카가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국하며 조선의 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고 합니다." 히나타 관장의 설명에 관람객들이 "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 한쪽에는 노리타카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적혀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선은 정치와 정략으로는 안 되며, 문화와 예술을 서로 교류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시관 인근에는 아사카와 형제가 태어난 집터와 아사카와가(家)의 묘지가 있다. 서울 망우리에 묻힌 다쿠미를 제외한 가족들의 묘다. 조선에 살던 당시 다쿠미는 한복을 입고 조선말을 쓰며 조선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장례에 조선인들이 찾아와 통곡하는 장면 등은 2011년 만들어진 한·일 합작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에도 담겨 있다. 영화 제작을 총괄했던 오자와 류이치(小澤龍一) 제작위원회 사무국장도 이날 현장을 찾아 영화 제작 뒷이야기 등을 들려줬다.
이날 답사엔 1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참가했다. 주일한국문화원측은 "30명을 모집하는 데 400명이 넘게 신청을 했다"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큰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영화 '백자의 사람'을 보고 아사카와 형제의 삶을 알게 됐다는 50대 여성 참가자는 "이 곳에 와보니 조선이라는 나라를 뜨겁게 사랑한 형제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며 "기회가 된다면 서울에 있는 다쿠미의 묘지에도 찾아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호쿠토(야마나시)=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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