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99를 동등히 봤던 분"..안병무 탄생 100주년, 그의 공동체 의식 기리는 걷기 행사 열려

신지호 2022. 6. 1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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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안병무 선생을 포함해, 3.1민주선언 사건 대법원 판결일에 불구속되거나 이미 석방된 상태 피고들이 정동 성공회 대성당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법정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길목 제공.


장마 직전 찜통 더위와 함께 이슬비가 내리던 18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 일대에서 한국 대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 탄생 100년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사회적 협동조합 길목(이사장 홍영진)은 1922년 6월 23일 태어나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된 안병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안병무 100년, 그의 길을 따라 걷는다’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안병무 평전’을 집필한 김남일 작가 해설과 함께 서울 시내 안 선생의 발자취를 걸으며 그를 기억했다. 이 자리에는 홍창의 서울대 명예교수의 아들 홍영진 길목 이사장을 비롯해 안 선생의 조카,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 연구소 실장) 목사, 씨앗순례길 회원들 등 22명이 참석했다.

오후 2시 서울 중구 일본군 위안부기억의터에서 시작된 걷기 행사는 옛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남산 향린원 터, 명동성당을 거쳐 향린교회 앞에서 마무리됐다.

18일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안병무 100년, 그의 길을 따라 걷는다’ 행사가 개최됐다. '안병무 평전'을 집필한 김남일 작가의 해설과 함께 위안부기억의터,옛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남산 향린원 터, 명동성당, 향린교회를 걸었다.


위안부기억의터에서 해설을 시작한 김 작가는 “안병무 선생을 생각하면 그저 편하다”며 “안 선생은 독선에 빠지지 않고 늘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자 했던 분이며,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중심에 입장에서 바라본 게 아니라 변두리가 잘 돼야 중심도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진 도착지 옛 중앙정보부터에서는 안 선생의 중앙정보부 투옥의 역사가 회고 됐다. 안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힘쓰다 1967년 동백림 사건과 1976년 3·1민주선언으로 두 번 투옥됐다.

향린원과 향린교회의 터에서는 안 선생의 신앙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앙동지들과 더불어 진정한 예수 공동체를 꿈꾸며, 1953년 남산 향린원 자리에 평신도 교회인 향린교회를 설립했다.

김 작가는 “안 선생은 교회도 교회지만 공동체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며 “사회학을 전공하며 예수님 자체에 대해 열심히 파고들었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씀의 신학’이 아니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는 사건의 신학’ 연구에 몰두했는데 안 선생은 자신의 어머님이 보여주신 당신의 희생을 보며 신학의 이미지를 다졌다”고 설명했다.

향린원 터 앞에서 홍 이사장 역시 유년 시절부터 함께했던 안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홍 이사장은 “한국전쟁 당시 고아원이었던 이곳 향린원에서 안병무 선생과 아버지(홍창의 교수)가 함께 향린교회 창립 멤버로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1살이었던 나도 이곳에서 십여년 유년 시절을 보냈다”며 “아버지가 유학 가신 뒤 많은 시간을 안 선생님과 보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덧붙였다.

1989년 안병무 선생의 미국 U.C 버클리대학 신학대학원 초빙교수 시절 모습이다. 길목 제공.


명동성당과 향린교회 앞에서는 안 선생의 공동체 의식이 다시금 강조됐다. 김 작가는 “안 선생님이 다른 민주투사와 달랐던 건 중심과 소수 모두를 동등하다고 생각한 분이었기 때문인데, 보통은 1과 99가 의견이 다르면 전체 100을 위해 1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안 선생은 1과 99 모두 동등하게 같다고 생각한 분”이라며 “이런 생각이 소수자, 노동자, 학생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이어 그는 “안 선생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과 해직을 거듭하고 매 순간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진정한 얼굴을 찾고자 노력했다고 그의 노력은 1996년 10월 19일 세상을 뜨는 그날까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여 진행된 걷기 행사는 오후 4시가 훌쩍 넘어서야 향린교회에서 마무리됐다. 김 작가는 “안병무 평전을 집필했지만 해설을 위해 평전과 숱한 자료를 다시 읽으며 그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추적해보는 시간이었고 해설을 맡아 안 선생을 돌아볼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사에 함께한 김 목사는 “안 선생님은 예수의 얼굴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던 분”이라며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예수님 얼굴 한번 제대로 그려보려고 하는 것인 만큼 바로 그리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한다”며 “향린교회 문 닫혀있는 걸 보니 맘이 찡하다”고 했다.

홍 이사장은 “아버지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나의 성서와, 신앙, 교회에 대한 생각은 모두 안병무 선생한테 배운 것”이라며 그를 추억 했다.

신지호 기자 p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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