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 99 vs 100, 극복할 수 없는 차이
‘착각’, ‘도전’, ‘토사구팽’, ‘파멸’, 이 네 단어는 특별한 연관성이 없으면서도 사실 연결된 말들이다. 그 키워드는 바로 ‘2인자’이다. 그 어떤 제국, 국가, 조직이든 확고한 리더 즉 1인자가 있고 그 아래에 자칭타칭 2인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2인자들의 말로가 ‘그는 2인자로서 참으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로 기록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2인자와 1인자의 관계, 즉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1인자와 2인자의 동거는 필요성 때문
역사적으로 1인자들에게 2인자가 필요해왔다. 뛰어난 능력으로 조직을 지속시키는 후계자로서의 필요성, 1인자의 철학과 가치를 계승하는 전파자로서의 필요성, 방대하고 복잡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필요성, 1인자 대신 악역을 담당하며 1인자의 통치에 미담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성,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자생적으로 존재감을 키우는 2인자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2인자도 1인자와의 동거가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이는 지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1인자와 2인자의 동거에서 가장 적합한 조건은 서로의 필요성이다. 이를테면 1인자에게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특별한 칼이 필요하고, 2인자 역시 1인자에게 잠시 받은 칼로 자신의 부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요성이 있다. 이 조건이 충족되면 두 사람의 동거는 시작된다. 1인자의 통치, 경영 철학을 절대 음감의 소유자처럼 받아들이고 이를 전파함으로써 1인자의 권력을 더욱 강건하게 만드는 2인자도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은 불편한 동거 혹은 기간이 정해진 동행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날 때쯤 1인자는 새로운 2인자가 필요하고 기존 2인자는 스스로 물러나거나 1인자에게 잔인한 버림을 당한다. 여기서 2인자의 착각이 시작된다. 바로 시간의 망각이다. 2인자는 1인자에게 자신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필요한 존재라 생각한다. 그 착각은 사실 2인자의 잘못만은 아니다. 2인자 역시 조직에서 나름 탁월한 존재이다. 능력, 판단력, 센스, 정무 감각 등등에서 뛰어난 그들이 어이 없는 착각에 빠지는 것은 조직에서 보여주는 2인자에 대한 감성 혹은 반응 때문이다. 조직과 조직원은 2인자에게 1인자와 동일한 대우와 경외감을 보낸다. 2인자의 말과 행동에 대한 반응 속도는 거의 1인자에 대해 보내는 그것과 동일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성격의 2인자라도 이런 반응이 몇 년, 몇십 년 지속되면 착각하게 된다. 즉 자신과 1인자를 점점 동일시하게 된다.
2인자는 생각한다. ‘내가 없는 1인자는?’ 그리고 스스로 그 대답을 찾는다. 자신의 존재가 없는 1인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정보 부재로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다. 결코 나 없는 1인자와 조직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어떤 조직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능동적 자생력이 있다. 물론 상당한 권한으로 조직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2인자가 하루 아침에 없어질 경우 그에 따른 진통은 있다. 그러나 대신할 3, 4, 5인자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2인자는 착각에 빠지면 안된다. 착각과 동시에 도전과 파멸의 수순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착각에 빠진 2인자는 1인자 자리가 바로 한 칸만 옮기면 되는 장기판으로 생각하고 이에 도전하는 무모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파멸과 토사구팽 신세가 된다. 역사에서 2인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죽으면 다행’인 자들이다. 수많은 2인자들이 야망과 월권을 휘두르다 1인자의 견제로 죽었고, 또 많은 2인자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3인자, 4인자에게 탄핵을 받았다. 그 원인은 위치를 망각한 욕망 때문이다. 즉 99개를 갖고 있는 것에 만족치 않고 1개를 더 얻어 100개를 채우고 싶은 ‘완벽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2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성공한 2인자는 99개를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한 이들이다. 이들은 1의 부족함이 자신의 생명과 자리, 집안을 보존한다는 것을 깨달은 현명한 2인자이다.
조선 인조 때의 2인자 김자점. 그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그 역시 1개를 더 채우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여 왕권에 도전했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했다. 김자점은 ‘할 수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인조의 죽음과 함께 다음 1인자인 효종에게 은퇴 선언을 하고 초야에 묻혔다면, 효종 역시 아버지의 중신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2인자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금기어이다. 2인자는 그 어떠한 경우라도 1인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이 귀여워하는 부마가 편전에서 왕이 자리를 비우자 호기심으로 왕의 자리에 잠깐 앉은 것만으로도 사약을 받은 기록도 있다. 2인자는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 그중에서 가장 키포인트는 ‘도전’이다.
기록을 보면 김자점은 관리 초기에 강직하고 주위의 평판도 좋았다. 그리 살갑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일 처리는 완벽했고 능력도 있었다. 그가 희대의 간신이 된 것은 인조의 무능과 약점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유일한 목표는 왕으로 죽는 것이다. 인조는 나라의 부강, 백성의 안녕보다 계속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병자호란에서 청 태종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뒤라면,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꿈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조는 두 번의 전란에 지쳐 ‘북벌’, ‘친명’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친청파를 매국노라 비난했지만 인조는 그런 비난조차 귀에 담지 않았다. 광해군이 보여준 명나라, 후금과의 중립적인 외교를 통해 국가의 실리를 얻겠다는 전략 따위란 인조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
인조에게는 능력 있고 기개 있는 관리보다는 자신의 뜻을 파악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한 2인자’가 필요했다. 김자점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인조가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많은 정적을 역모로 몰아 숙청했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자의 아들들에게 잔인한 처벌을 주장했던 것도 인조의 속내를 알았기 때문이다. 김자점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손자를 부마로 올려 왕실과 인연을 맺었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같은 반정 공신은 물론 임경업 장군까지 숙청했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어떤 정권의 2인자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선. 하지만 김자점은 진짜 역모를 꾀했다. 효종에 의해 권력 중추에서 벗어나자 그는 자신이 1인자가 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자점의 착각이었다.
김자점은 인조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농단하면서 자신이 마치 1인자라는 생각을 했다. 수십 년 동안 1인자의 입을 통해서 나온 지시와 명령이 자신이 생각하고 인조와 상의한 결과였기에 김자점은 1인자의 권위와 명령도 자신의 것과 동일하다고 착각했다. 물론 김자점의 이런 오판은 1인자가 인조였기에 가능했다. 김자점과 인조는 같은 목적이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다. 인조는 김자점에게 권력과 부를, 김자점은 인조에게 왕좌의 유지를 보장했다. 김자점은 권력을 내놓는 대가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2인자로서 보아온 1인자의 자리를, 그저 한 칸만 위로 올라가면 되는 것이라 판단했다.
김자점은 연산군의 유자광, 임사홍, 광해군의 이이첨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이다. 김자점은 다른 간신과 마찬가지로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적으로 죽고 난 뒤까지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그 역시 초기에는 선비의 기개와 함께,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의 도를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고 부귀에 눈이 멀어 왕권에 도전하는 역모를 꾀하다 멸족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민심이 이반되고 어지러웠던 혼군의 시기는 언제일까. 물론 왕조 말엽 순조부터 고종까지의 약 100년 시기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시기는 왕조의 근본이 흔들린 멸망기였다. 학자들은 대부분 선조, 광해군, 인조의 90년 통치기가 조선의 최대 위기라 손꼽는다. 이 시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전란과 이에 대처하는 군주의 능력은 낙제점이었다.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리더의 의무를 저버렸다. 광해군은 개혁과 선정을 베풀려 했지만 쿠데타로 쫓겨났다.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공신, 사림, 서인에 시달렸고 인조 역시 왕권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광해군 시절부터 정권 교체는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각 당파는 ‘집권 아니면 죽음’이라는 제로섬 게임에 함몰되었다. 공정한 집권 세력의 교체를 통한 새로운 정책, 민심을 주도하는 리더십이 사라졌다. 암군(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 인조 옆에는 간신 김자점이 있었다.
김자점에 대한 비난과 탄핵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김자점은 오뚜기 같은 생존능력의 소유자. 그는 광해군 시절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해 쫓겨났지만 이후 반정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하지만 인조의 세자빈 간택에 앞장서 반대하다 또 쫓겨났다가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방 분야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복권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정예 함경도 군대를 지휘했지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인조가 머문 남한산성으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또 쫓겨났다. 그러나 인조는 김자점을 다시 불렀다. 이처럼 김자점은 몇 번의 위기와 복권을 거듭하면서 인조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인조 시대의 정치 지형은 네 개 세력이 대립했다. 김류, 이귀 등 반정 공신, 신경진, 구인후 등 반정 공신 무장, 친명 정책의 소장파 사대부, 그리고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학문으로 사상을 지배했던 산림 세력이다. 이들 중에 인조가 신뢰할 세력은 없었다. 인조는 사람이 필요했다.
김자점은 인조에게 충성을 다했다. 악역을 도맡았고 역모 사건을 기획했다. 그리고 인조가 불편했던 인조의 장자 소현 세자의 급서와 세자빈 죽음, 세자의 세 아들의 제주도 유폐 또한 김자점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마무리 지었다. 역설적으로 김자점은 인조에게 ‘충신’이었다. 시키면 무엇이든, 반대 의견 없이, 자신이 하는 일이 리더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김자점은 인조와 자신을 동일 결사체라 판단했다. 2인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와 착각이 이처럼 1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2인자는 리더의 안녕과 권위 유지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 평가에서 종종 한 가지를 빼놓는다. 리더가 갖는 권위는 유일한 오너이자 전략적 지배자라는 위치이다. 1인자는 자신의 권력 중 일부를 잠시 2인자에게 빌려줄 뿐이다. 2인자는 이를 착각한다. ‘나도 1인자와 비슷한 위치다, 나 없이 1인자는 존재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이 조직의 지분이 있다, 나도 지배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2인자는 파멸에 길에 들어선다.
김자점 역시 이를 간과했다. 인조 시대는 무사하게 지나갈 수 있었지만 세자 시절부터 그의 월권이 마땅치 않았던 효종에게 숙청당했다. 김자점은 그 순간에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인조가 효종에게 “김자점을 나처럼 대하라”고 당부한 관계로, 효종 역시 그의 목숨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자점은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1인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사지가 잘리는 형을 당했다. 역사는 냉혹하다. 2인자의 처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있어 이 조직이, 1인자가 존재할 수 있다’, ‘1인자를 위해 무엇이든 해내는 것이 충성이다’라는 착각이다.
김자점은 15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 명장 김방경의 후손이다. 김자점은 영특해 학문적 성취가 높았다. 김자점은 음서를 통해 병조좌랑이 되었다. ‘김자점은 성미가 급하고 성격이 강경했으나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다. 해서 병조의 하급 관리들이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라는 당시 기록으로 보아 그는 나름 강직하고 능력도 있어 주의의 신망도 있었다.
김자점은 서인이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마저 별궁에 가두었다. 김자점은 이에 반대하다 쫓겨났다. 서인들은 반정을 선택했다. 김자점은 최명길, 심기원과 한 배를 타기로 밀약했다. 1623년 3월13일, 김자점과 이괄은 군사를 모아 이귀, 김류 등과 합세해 궁으로 진격했다. 반정군의 세는 약 2000여 명.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로 반군에게 잡혔고 인목대비는 능양군에게 옥새를 넘겼다. 이 능양군이 바로 인조이다. 인조는 김자점, 이귀, 김류 등 총 33명을 정사공신으로 봉했다. 김자점은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자 반정 2등 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불만이 컸다. 이괄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을 숙청하려 했던 이귀는 이괄의 아들을 모함했다. 인조는 이괄의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라 명했다. 1등 공신이 되지 못한 것도, 평안도 변방으로 쫓겨난 것도 참기 어려웠는데 역모라니. 이괄은 금부도사를 죽이고 군대를 휘몰아 한양으로 향했다. 이괄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군사는 없었다.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다. 그 사이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도망갔다. 김자점은 인조를 수행했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은 주춤했다. 이때 임경업이 이천에서 이괄 군대를 대파한다. 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이괄의 부하들은 이괄의 목을 베고 항복했다. 반란이 진압되고 김자점은 경연특진관으로 인조의 학문 파트너가 되었다.
김자점은 늘 인조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인조는 어느날 세자빈 간택을 추진했다. 윤의립의 딸이 물망에 올랐다. 윤의립은 서인이 아니었다. 서인 세력은 윤의립이 이괄의 반란에 가담한 윤인발의 숙부라는 이유로 간택을 반대했다. 김자점은 그 앞에 섰다. 인조는 공신의 협박에 무릎을 꿇었다. 세자빈 간택을 취소했지만 인조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인조는 ‘김자점이 당파의 이익만 앞세운다’며 그를 쫓아냈다.
김자점이 조정에 복귀한 것은 정묘호란 때이다. 후금 군대는 한양으로 치달았다. 인조는 서인들이 ‘김자점은 군대를 잘 알고 있다’해 김자점을 불렀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인조는 강화도까지 함께 한 김자점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자점은 도원수 즉 조선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진지를 구축하고 성곽을 수리하며 후금의 공격에 대비했다. 후금에 맞서지 않고 산성에서 농성전을 펴는 것이었다. 그는 한양이 위험하면 강화도로 왕실을 옮겨 장기전을 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김자점은 토산에서 청나라 군을 격파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바로 그날, 오히려 청나라가 기습을 해왔다. 김자점은 도망갔고 몇몇 장수들이 맞섰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패배로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끝내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김자점을 귀양 보냈다. 인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김자점이 사라졌지만 조정은 여전히 당파 싸움에 몰두했다. 인조는 파벌 싸움과 북벌을 주장하는 사림의 압박에 지쳐갔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인조는 김자점을 호위대장으로 임명했다. 서인은 물론 조정 관리들이 반대했지만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44년, 공신 심기원의 역모사건이 터졌다. 청나라에 인질로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소현세자 장인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했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의 문상을 막았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기원이 ‘인조를 폐하고 회은군을 왕위에 올리자’는 역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원과 회은군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김자점은 이 사건을 크게 만들었다. 결국 심기원, 회은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자점은 좌의정, 낙흥부원군 봉작을 받았다. 그리고 인조의 딸 효명옹주를 손자 김세룡과 결혼시켰다. 김자점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대세이자 실리라며 친청파를 이끌었다. 이는 김자점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진정한 길이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이라는 애국적 판단보다는 국내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나라의 후원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소현세자가 돌아왔다. 세자는 청나라 문물을 바탕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야심가. 하지만 인조는 세자를 라이벌로 여겼다.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를 왕위에 앉히지 않을까 의심했다. 그해 소현세자는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은 가벼운 병이라 했지만 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인조는 의관들을 벌주지 않았다.
정국은 급변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봉림대군의 아들 이연을 세손으로 봉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소현세자와 그 후손을 배척했다. 김자점은 인조의 속내를 읽었다. 그는 인조가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물론 그 아들 3형제의 제거를 원한다고 판단했다. 김자점은 움직였다. 세자빈이 소현세자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인조 독살을 기도했다며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아들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모든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김자점은 여론을 조성해 결국 소현세자 일가를 멸족시켰다. 김자점은 영의정이 되었다.
김자점은 권신이자 왕실의 외척, 인조의 신임 등 모자랄 것 없는 권세를 누렸지만 그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2인자로서 완벽하고 싶었던 김자점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것은 왕실 즉 오너가의 후계 싸움에 발을 담근 것. 일시적으로 김자점의 야망은 일시적으로 실현되었지만 이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간과한 것이었다. 영특한 봉림대군의 존재를 망각한 김자점은 소현세자를 제거해 왕위에 오를 봉림대군이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봉림대군은 김자점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었다.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하고 홍천으로 유배 보냈다. 효종은 김자점이 아버지가 신임했던 중신이기에 목숨만은 살린 것이다. 김자점도 이를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효종에게 앙심을 품었다. 김자점은 청나라 역관 이형장을 통해 효종의 북벌론을 밀고했다. 청나라는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고 사신을 보냈다. 효종과 대신들은 사신을 설득해 청나라의 의심을 풀 수 있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살려 둘 수 없다 생각했다. 그때 김자점 역모 상소가 올라왔다. 김자점이 반정을 일으켜 아들 김세룡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반정이 아니라 왕조를 멸하려 한 것. 결국 1651년 김자점은 능지처참 당했다. 이때 김자점의 나이 63세이다.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불었다. 김자점과 공모한 귀인 조 씨는 사약을 받았고 김자점 일족은 멸문 당했다. 김자점의 손부 효명옹주는 왕족이라 사형은 면하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것이 바로 99의 균형을 잃은 2인자의 말로였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컬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