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종이달, 루나의 몰락

김현길 2022. 6. 3.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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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사소했다.

지갑 속 5만엔을 떠올리며 모처럼 화장품을 사려 했는데 돈이 없었다.

고객이 맡긴 돈이 가방 속 봉투에 담겨 있었다.

리카가 돈을 '빌려 쓴' 고객 중엔 부동산을 처분해 현금이 넉넉한 고령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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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길 사회부 차장


시작은 사소했다. 지갑 속 5만엔을 떠올리며 모처럼 화장품을 사려 했는데 돈이 없었다. 당황했지만 이내 수중에 돈이 없진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객이 맡긴 돈이 가방 속 봉투에 담겨 있었다. 망설임 없이 봉투에서 1만엔 지폐 다섯 장을 꺼내 계산했다. 바로 자동입출금기에서 찾아 메우면 된다고 생각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몇 분 뒤 기계에서 5만엔을 찾아 봉투에 돌려놓을 때 흘끗 뒤를 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일본 소설 ‘종이달’은 유부녀 계약직 은행원 우메자와 리카의 ‘5만엔 횡령’에서 연유한 일상의 미세한 균열이 더는 이어 붙일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남의 돈에 처음 손댄 그날의 경험은 리카를 돌려 세웠다. 그는 고객 예금을 가로챈 후 중간에 해지하거나 만기 도래 시 다른 고객 돈으로 돌려 막았다. 범행은 점차 대담해졌고, 그만큼 그와 띠동갑 연하 애인의 씀씀이도 커졌다. 그럼에도 언젠가 ‘빌린’ 돈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떤 범죄는 사회의 그늘을 표상한다. 범행 동기도 개인에 현미경을 댔다가 한발 물러서 원경을 함께 살필 때 온전히 퍼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종이달이 현실과 밀접히 연결된 핍진성(逼眞性)을 확보한 것도 소설 속 시공간에 크게 빚진다. 남편과의 관계, 개인의 성정 같은 내적 동기는 리카의 횡령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지만 버블이 마지막 덩치를 키웠다 까라지는 1990년대 일본이 소설 배경이 된 것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

소설에선 부동산 등 자산이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상황에서 상승의 혜택을 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나뉜다. 리카가 돈을 ‘빌려 쓴’ 고객 중엔 부동산을 처분해 현금이 넉넉한 고령자들이 많았다. 다른 편엔 풍족했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아내, 전단지를 일별한 후 자전거를 타고 마트를 돌며 할인하는 물건만 사는 주부, 가난한 고학생 같은 팍팍한 현실을 보여주는 자식 세대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국내 신문 사회면에서 여러 모습의 리카를 발견하는 건 익숙한 일이 됐다. 중견기업, 대기업, 공기업, 은행, 새마을금고, 구청처럼 일하는 곳을 가리지 않고 수십억원에서 수천억원까지 남의 돈에 손댄 이들이 튀어나왔다. 횡령 자체는 꾸준히 있었지만 요즘처럼 직종 가리지 않고 경쟁하듯 사건이 터지는 건 드문 일이다. 돈에 손댄 이들은 대체로 고위직보다 실무자에 가까웠고, 가로챈 돈을 주식 코인 등에 투자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남의 돈으로 대담하게 투자하는 횡령범들이 줄을 잇는 사회에 드리워진 그늘은 무엇일까. 사내 감시가 취약하고, 횡령액 환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시스템에 대한 지적은 옳다. 동시에 최근 몇년 사이 자산시장 폭등의 직간접적 영향 때문이란 해석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잡을 수 없게 된 자산 격차를 만회하기 위해 남의 돈에까지 유혹을 느끼고, 자산 상승에서 소외되지 않겠다는 다급함이 무모함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계속 오를 것처럼 보였던 자산시장 지표가 냉각된 후 횡령 범죄가 잇따라 적발된 건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지난달 테라(Terra)와 함께 폭락한 자매 코인 루나(Luna)는 달, 달의 여신을 의미한다. 영국 가디언은 폭락 사태 이후 “모든 가상화폐 붕괴와 마찬가지로,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는 계획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수많은 이들이 돈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라고 썼다. 소설 속 90년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 욕망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쉽다. 빨리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갈수록 대담해지는 횡령이 무관하게 생각되지 않는 이유다.

김현길 사회부 차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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