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송전철탑이라는 블루오션

2022. 6. 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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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우와, 아파트 진짜 많다!” 산 정상에 오르면 들리는 감탄사다. 그런데 그 느낌표 뒤에 대개 비난이 이어진다. 다 궤짝 같다. 획일적인 몰골에 대한 지탄이 넘치고 반성이 무르익자 아파트 입면 특화사업이라는 게 벌어졌다. 옥상에 이상한 장식물 올려놓고 벽에 공연히 띠를 둘렀다. 좋은 디자인은 첨가와 장식으로 얻는 게 아니라는 기본 원칙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도시 풍경이 이루어졌다. 도시가 유치원 앞마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좀더 높은 곳에 올라가 보자. 제주도에서 탄 비행기가 수도권에 이르면 저 아래 말린 해삼뭉치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와, 골프장 진짜 많다!” 골프는 한량 사치풍류가 아니라 대중 일상도락에 가까워졌다 하니 더 이상 시빗거리는 아니다. 사실 골프장은 대개 산속에 숨어있으므로 경관이라는 점에서 비난거리도 아니다. 그런데 골프의 문제는 골프장이 아니라 골프연습장에 있다.

「 방치와 장식, 극단의 도시구조물
공학도와 디자이너 사이의 공백
도시구조물은 사회 역량의 자화상
새 디자인으로 세계 선도할 기회

골프는 변수 많은 자연 속의 귀족 놀이였던지라 규정은 복잡하고 예법은 엄정하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고 연습이 요구된다. 연습장은 도시에 가까워야 좋겠으나 땅값과 소음 분쟁으로 적당히 외곽부에 물러나 있어야 한다.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는 그물망 골프연습장이다. 그런데 골프채는 해마다 진화한다는데 골프연습장은 우리 시대의 삼엽충인지 여전히 무심하고 끔찍한 모습이다. 그 크고도 흉측한 덩치를 도시 여기저기에 밀어 넣는 게 문제다.

해삼뭉치나 삼엽충보다 더 괴상한 것이 있다. 꼭 필요한 것이나 가까이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그건 송전철탑이다. 종종 극단 갈등의 대상인 혐오기피 구조물이니 산간지역에 우회설치된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산천풍광 좋은 곳을 종횡무진 누벼야 하는 모순의 주인공이다. 미국의 첫 디자인으로부터 백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이 물건 역시 진화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일한 형태라는 게 더 특이하다. 송전철탑에 관한 성토 역시 범세계적이다. 그래서 기둥형 철탑이 세워졌고 사람 모양, 동물 모양 철탑을 대안으로 내세운 나라도 있다. 국토가 동물원이거나 희극장으로 변한 사례다.

도시구조물에 대한 비난이 접수되면 엔지니어들은 미적 감각 없는 공학도일 뿐이라며 겸손하게 미술 전공 디자이너들을 초대하고는 한다.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공학적 지식이 없는 게 문제다. 그래서 한국의 도시구조물은 방치나 장식의 양극단으로 치달았다. 경향 각지에 나비·고추·사과·두루미를 매단 육교·가로등·보가 세워졌다.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곳에 굳이 현수교·사장교가 랜드마크라며 세워졌다. 무지개를 형상화했다는 다리는 여고 동창회장 명품가방처럼 도시마다 하나씩 구비하고 있는 듯하다.

디자인은 문제를 규정하고 해결의 형태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잠재한 문제를 명료히 규명하기 위해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규정된 문제를 푸는 것은 변수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인데 거기 미적 감수성이 개입한다. 전체 과정에서 일관되게 필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도시구조물은 조각작품이나 평면조형물과 달라서 구조역학의 지배를 받는다. 더 가볍거나 더 튼튼하거나 더 쉽게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진화의 기본 조건이다. 좋은 도시구조물은 장식으로 덮인 것이 아니고 엄정한 구조적 논리를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을 표현하는 찬사의 단어는 예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아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구조물이라면 나는 비행기를 꼽는다. 극단적 조건에 대한 극단적 논리가 만든 이 구조물은 볼 때마다 전율적이다. 비행기의 모습들이 다양한 것은 문제를 규명하는 방법에 따라 최적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들이 다 아름답고 우아한 것은 최적값에 근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여기 주관적 감수성이나 자의적 취향의 장식이 덧붙을 자리는 없다. 이것이 도시구조물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고 공유하는 철학이다. 도시구조물은 그걸 세운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창조적 상상력·엔지니어링 능력 통합의 물적 체현이고 도시 속 공개증언이다. 구조적 논리가 없는 짝퉁 구조체를 장식으로 붙인 구조물들은 우리 시대에 대한 모독적 자화상이다.

골프연습장·송전철탑·비닐하우스·방음벽 등은 국토에 가득하되 여전히 흉물 비난의 구조물들이다. 심지어 송전철탑은 전세계 규모 시장의 구조물이다. 디자인은 문제의 인식과 규명에서 시작되니 지금의 구조체가 최적값은 분명 아니다.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서는 송전철탑을 무더기로 세워야 하고 기존 송전철탑도 내구연한 도래로 교체해야 한다. 블루오션은 생각을 뒤집는 곳에 있더라. 더 가볍고 튼튼하고 쉽게 세울 수 있는 도시구조물로 ‘K-디자인’의 이름표 달고 세계 시장을 바꿀 수 있겠다. 대통령도 바뀌고 지자체장들도 새로 뽑았으니 마침 꿈을 꿔야 하는 시기다. 이제는 도시에 유치원 장식 좀 그만두자. 우아한 도시구조물의 국토 풍경을 대한민국이 앞서서 개척해보자. 우와, 할 일 진짜 많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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