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한국형 능력주의 방치는 죄악"

김남중 2022. 6. 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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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시험능력주의
김동춘 지음
창비, 424쪽, 2만원
진보 사회학자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시험능력주의’ 출간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학력주의나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은 능력주의 앞에서 무력하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도 능력주의라는 벽에 막히고 만다. 이제 능력주의를 넘지 못하면 개혁이나 진보를 말하기가 불가능해진 걸까. 지난해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 사회비평가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 등이 주도한 능력주의 비판이 올해도 이어진다. 이번엔 진보 사회학자인 김동춘(63) 성공회대 교수가 가세했다.

김 교수는 새 책 ‘시험능력주의’에서 한국에서 유행하는 능력주의는 실적이나 이력이 아니라 주로 대학 입시나 고시를 통해 형성된다며 시험능력주의로 규정한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별이 공정하다는 생각을 말하는데, 시험능력주의는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가 시험이라고 본다. 대입 정시 확대론이나 사법고시 부활론은 시험능력주의를 대변하는 주장들이다.


저자는 시험능력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비판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능력주의 문제를 다룬다. 한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입시 경쟁과 고시 광풍을 능력주의라는 틀에서 분석하고, 교육 문제가 입시제도 개편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채용이나 노동, 복지, 대학 등을 바꿔야 하는 정치적 문제임을 알려준다.

저자는 시험능력주의를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조명한다. 시험은 한국에서 교육 수준을 평가하거나 적임자를 선발하는 도구 이상이다. 누가 엘리트가 되는가, 누가 권력과 부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시험능력주의는 “학력, 즉 시험 합격 능력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고 그들이 국가기관이나 사회조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드는 지배질서나 이데올로기”이며 “학교, 학원만이 아니라 기업, 정부, 혹은 사회조직이나 사회관계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지배층이나 엘리트층 형성에서 과도할 정도의 시험능력주의가 작동한다고 진단한다. 명문대나 고시 출신의 ‘시험형 인간’ ‘시험선수’들이 엘리트가 되고 권력과 부를 차지한다. 이를 용인하는 건 대중들이 시험능력주의를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시험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지배층의 부와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모습도 짚는다.

시험능력주의는 변별과 배제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시험에서 패배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특히 노동에 대한 천시는 시험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다. 저자는 “대입 경쟁은 ‘노동’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전략, 노동자 ‘신분’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비하, 저임금, 고용불안, 위험한 일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며 “과도한 학벌경쟁, 입시경쟁은 곧 달리 표현된 노동문제”라고 주장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선 대안을 모색한다. “시험능력주의가 아닌 실적능력주의로 가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우선 기업들이 사람을 채용할 때 학력 이외의 다른 평가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실적주의와 잠재력 평가가 그 방향이 될 수 있다. 법조인, 관료, 전문직 등 시험 승자들에 대한 특권은 대폭 축소해야 하고, 대학 서열화를 깨기 위해 서울대와 나머지 국립대학의 통합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명문대 입학이 아니더라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통로를 더 만들어야 한다. 사회복지 확대, 사회안전망 구축, 학력별 임금격차 축소, 노동자 보호 등이 이와 관련된 주제들이다.

김 교수는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등장은 시험능력주의가 권력의 장으로까지 확장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고시 출신이 법조인으로 있다가 곧바로 대통령이 된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015년 구의역 김군 사망 사건과 특성화고 학생들의 비극적인 산재 사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며 “시험능력주의 뒷면에 있는 청년들과 아이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 이를 방치하는 건 기성세대의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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