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퍼스트의 시대..기업 경영의 우선순위 바꿨다[우크라충격파④]

정현진 2022. 6. 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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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펀앤테이스티’, ‘디온리웨이’, ‘프리체크아웃’. 러시아에서 맥도날드를 대체할 상호명 후보가 현지 당국에 등록됐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 여파로 맥도날드가 32년 만에 사업을 러시아 현지에 넘긴지 불과 2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나온 것이다. 맥도날드와 함께 최근 러시아 사업 철수를 선언한 세계 최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와 미 스포츠웨어 브랜드 나이키도 간판을 새롭게 고쳐달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잇따라 탈출하는 서방 기업들을 곧바로 인수해 지역 경제와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기업에 ‘블랙스완’이었던 러 침공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업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블랙스완’ 이슈였다. 러시아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는 기업들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한 이슈에 부딪혀 손해를 보면서까지 현지 사업을 접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됐다. 지난 4~5월 중 있었던 실적 발표에서 글로벌 기업들은 잇따라 러시아에서 발생한 자산 피해규모를 발표했다. 영국 에너지 기업 BP는 지난 1분기 러시아 사업 철수로 255억달러(약 32조2000억원)의 비용이 발생했고 구글의 러시아 자회사는 현지 법원이 주거래 계좌를 동결한 이후 파산 신청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잦아지면서 지정학적 리스크는 기업이 고려해야할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 특히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생성하는 원자재나 농산물 등에 영향을 주는 공급망 문제를 넘어서서 사업적 측면에서 브랜드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됐다. 미 PR컨설팅 회사인 에델만이 지난달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을 앞두고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14개국의 1만4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5%가 다른 국가를 정당한 이유없이 침략하는 경우 정치·경제적인 압박을 가해야한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10명 중 6명은 사업을 할 때 고려해야할 핵심 우선순위 중 하나로 지정학적 리스크를 꼽았다.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교수가 추적중인 글로벌 기업들

결국 러시아 침공 이후 3개월 만에 1000여개의 기업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사업을 축소했으며 현지 투자를 줄였다. 전쟁 초기부터 글로벌 기업의 러시아 사업 진행 여부를 추적해온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교수는 "역사적으로 이처럼 대규모로 신속하고 자발적인 사업 철수는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면서 "19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 등에 항의해 철수한 기업 규모인 200여개의 다섯배 수준"이라고 말했다.

오프→온·리→프렌드쇼어링까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됐던 세계화의 위기에 불을 지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과 유럽이 하나로 뭉쳐 각종 제재 등으로 대응했고 진영을 구축하면서 사실상 신(新) 냉전시대로 돌입했다. 러시아 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기술을 비롯해 각종 이슈로 치열하게 갈등을 벌이며 서로에게 제재를 부과하거나 동맹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협정을 맺는 상황이다. 이에 기업들은 국제 정치 이슈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를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됐다.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프렌드쇼어링’이 부각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프렌드쇼어링은 외교적인 갈등에서 자유로운 우호국에 생산시설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코로나19 여파로 공급망·물류난이 확산, 장기화하면서 기업들은 오프쇼어링(비용 절감을 위한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에서 온쇼어링·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자국 복귀)하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잇따라 수정했다. 하지만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을 겪으면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핵심 고려 대상으로 떠올랐고 단순히 자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길 뿐 아니라 동맹국들과 함께 공급망을 구축하는 프렌드쇼어링으로 확산한 것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프렌드쇼어링을 주도하고 있는 곳은 바로 미국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특정 국가가 원자재, 기술, 생산에서 시장 지위를 이용해 경제를 교란하면 안된다며 공급망 문제와 관련해 동맹국들과 상호의존하는 프렌드쇼어링 전략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최근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 반도체 등 기술동맹을 다졌으며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발족시켰다.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전격 회동하며 협력하기로 하는 등 지정학을 바탕으로 한 기업의 움직임도 속도를 내고 있다.

기업경영상 리스크 대비

기업들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핵심 고려 요소로 보고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면서 탄력성 있는 공급망 등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히타치제작소는 지난 4월 섭외 부문 내 경제안전보장실을 신설했다. 이를 통해 경제안보와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석하겠다는 것이다. 중공업 업체 IHI는 지난해 10월 경제안전보장총괄부를 설치해 전략물자의 안정적 공급 등과 관련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에 대응해 사업계획을 세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기린HD는 경영진을 대상으로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한 연수를 실시했고 이토추상사는 지난해 리스크 관리 지침을 세분화했으며 미쓰비시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인 2020년 사장실 직속으로 경제안전보장총괄실을 신설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는 "서방 기업 대부분은 리스크 분석과 관련한 전문 조직을 마련해두고 있어 영국 쉘의 경우 과학적 예측을 수반하는 시나리오 분석을 1970년대부터 도입, 이번에도 이에 근거해 러시아 사업 철수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세계 4대 회계·컨설팅법인인 언스트앤영(EY)은 지난달 한 보고서를 통해 "지정학적 동맹이 경제적 고려사항보다 사업적 결정에 더 많은 영향을 주게 됐다"면서 "지정학적 권력의 변화는 성장과 투자기회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지정학적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위험 평가 ▲여러 기능의 지정학적 전략팀 구성 ▲지정학적 현실에 맞는 전략 수정 등에 우선순위를 둬야한다고 조언했다. EY는 "경영진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회사의 운영, 공급망, 전략을 재평가해야한다"고 덧붙였다.

WEF 이사회 멤버인 짐 하게만 스나베 지멘스 감독이사회 회장은 지난달 다보스포럼에서 "현재의 전 세계 지정학적 상황은 세계화의 성공과 더욱 상호연결된 경제가 현재와 미래의 무장 충돌과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합리적인 장기 전략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던진다"면서 "그럼에도 많은 이점이 있는 만큼 사람과 아이디어, 상품과 문화의 국제적인 이동성을 강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탄력성과 적응력, 협업, 신뢰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면서 기업과 정부, 시민사회에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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