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9>] 진상 손님

데스크 2022. 6. 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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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9화 진상 손님


“요즘 택시 영업 잘 안 되죠?”


진양대교에서 강변로로 접어들면 종종 차량 정체가 일어나는데 아니나 다를까 택시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틈을 타서 김석규가 말을 걸었다. 택시 기사는 곁눈질로 김석규를 힐끔거리더니 짧게 대꾸했다.


“날 알아요?”


기가 끅 차는 반문이었다. 딴에는 요즘 택시영업이 좀 잘 되는 건지 어떤지 손님으로서 걱정이 되어 물어보는데 고맙다는 소리를 밑밥 깔 듯 깔지는 못할망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주면 될 일을 까칠하게 언제 봤다고 그딴 걸 물어보냐는 식이었다. 아마 전쟁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건 김석규의 눈빛이 택시기사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김석규는 건방지게 보이더라도 한번 대거리를 해 줄까 고민하다가 휴전 중인 군인 신분임을 감안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사장님을 알아서 물어 보는 게 아니라 요즘 택시가 어렵다 하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나는 또 아는 사람이라 그러는 줄 알았네.”


역시 기가 막히는 답변이었다. 그래도 김석규는 마음을 추스르며 진짜 답변을 기다렸다. 택시 영업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대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택시기사는 잊어먹은 건지 무시하는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김석규는 기분이 엄청 상했지만 애당초 답변을 꼭 들어야 하는 그런 류의 질문이 아니라 툭 하고 무심코 던지는 질문이었기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며 잠자코 앉아있었다.


택시영업이 잘 되고 안 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저 나는 잔돈만 잘 챙겨 가면 되지. 김석규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택시기사의 행동을 지켜보며 조수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택시비 잔돈을 챙기지 않았지만 오늘은 택시기사의 말본새에 기분이 나빠져서 김석규는 백 원짜리 동전 세 개가 손에 쥐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차했다.


중후하고 선량한 인상의 택시기사는 새벽 출근길에 아내가 집어준 소금을 운전석 차창너머로 힘껏 뿌렸다. 근무 중 진상 승객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거들랑 맞대응하는 대신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화를 삭이라고 아내는 신신당부했었다.


승객이 드문 토요일 낮 시간대. 택시기사는 백 미터 앞에서 손을 흔드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까 생각했었다. 흔들어대는 몸짓이 과장되어 보이는 게 낮술을 한잔 걸친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승객도 아쉬운 판에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차를 세웠다. 택시기사는 아내의 당부를 떠올리며 호주머니에 든 소금봉지를 손으로 확인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승객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역겨운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대체로 취객들은 꼭 뒷좌석 대신 조수석을 선호했고 쓸데없는 말들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객이 혀 꼬이는 소리로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쯧쯧. 보아하니 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 것 같은데 차라리 다른 직업을 구해보지 그래요? 요즘 택시 영업도 잘 안 된다고 하던데.”


택시기사는 자신보다 한참 젊은 승객의 무례에 기가 끅 찼지만 대꾸하다 보면 아내의 신신당부를 어기게 될 것만 같아 슬쩍 흘겨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남 같지 않아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걱정이. 쯧쯧.”


택시기사의 마뜩찮은 눈빛에 승객이 다시 혀를 끌끌 찼다.


“날 알아요?”


택시기사는 승객의 계속되는 무례에 기분이 몹시 나빴다.


“사장님을 알아서 걱정해 주는 게 아니라 요즘 택시가 어렵다 하니까 노파심에 그러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나는 또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택시기사는 호주머니 속의 소금봉지를 손으로 쥐어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승객은 계속 혼잣말을 주절댔지만 택시기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승객이 현금으로 택시비를 지불했다. 택시기사는 현금을 받으며 한시라도 빨리 진상 승객이 내리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승객은 내릴 생각일랑 하지 않고 도끼눈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것이었다. 택시기사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 퍼뜩 잔돈 삼백 원을 거슬러 주었고 그제야 승객이 하차했다.



“이보게 석규!”


군살 하나 없이 비쩍 마른 임봉식이 문화예술회관 쪽으로 올라와 반갑게 소리쳤다. 원래 마른 체형이 아닌데 작년에 치질 수술을 하면서 빠진 살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했다. 임봉식은 다섯 살배기 막내딸 보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창때 동안의 대명사로 불렸던 임봉식은 야구모자까지 눌러썼지만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임봉식은 룸펜 아닌 룸펜으로 햇빛을 잘 보지 못해 허여멀개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서있었다. 보해가 김석규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다가 취기에 핏발 선 눈과 마주치자 임봉식의 등 뒤로 냉큼 몸을 숨겼다. 새처럼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괜찮아. 이 아저씨는 항상 이래.”


임봉식이 보해를 안심시키며 앞으로 당겨보았지만 보해는 엉덩이를 쭉 빼고 버텼다. 보해의 작은 몸이 까치발에 의지해 버티는 모습을 보며 김석규와 임봉식은 동시에 껄껄 웃었다. 보해가 아빠의 웃음소리에 마음이 풀렸는지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함박미소를 지어보였다. 봄날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김석규는 탄약통이 비교적 가볍긴 했지만 보해도 있고 해서 근처 실내전투장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문화예술회관 앞은 찻집들로 즐비했고 오후 시간대에 전투를 치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김석규가 고심 끝에 야외 전투를 넌지시 제안하자 임봉식이 빈손을 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처분권을 행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김석규는 지체 없이 24시 마트에 들어가 만만한 교전 상대를 골랐다.


“대낮이고 하니까 아무래도 화력이 약한 게 낫겠지.”


임봉식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김석규가 막걸리 통을 집어 들었다. 막걸리는 전투력도 보잘 것 없지만 특히 지원무기가 부실해 그들이 만만하게 보는 적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물론 전투상황에 따라서는 홍어삼합 같은 중무장 병기가 지원되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막걸리의 지원무기는 새우깡이나 고깔콘 정도였고, 재래식 무기로 풋고추나 김치가 있었다. 김석규는 지원무기로 과자 서너 봉지를 지목했는데 그건 보해까지 염두에 둔 일석삼사조의 포석이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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