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을 위한 춤의 생존경쟁이 몸의 원형을 사유하다
안치용 2022. 6. 1. 12:33
[공연 리뷰]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거의>
5월 26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의 휘날레 파트를 맡은 차진엽이 소개한 춤 또한 세마이다. 대체로 남자가 치마 비슷한 걸 입고 춤을 추는 터키 현지와 달리 이날 공연에서는 여성 무용수인 차진엽이 바지를 입고 자기 식으로 세마를 해석해 비슷한 듯 다르게 무대에서 선보였다. 세마가 이슬람 지역의 관광상품이 되면서 춤에서 신비주의의 흔적이 사라지고 서커스처럼 변모한 반면 차진엽이 공연에서 춘 제자리 돌기 춤은, 신비주의를 구현했다고 하기엔 과하지만 그 언저리를 맴도는 진지함을 선사했다.
연극, 토크쇼, 무용이 혼합된 다소 실험적 작품이다. 안무가가 직접 공연에 참여하여 비(非)공연 방식의 공연으로 전체 공연에 영향을 미친다. 소설에서 작가가 끼어든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메타'적 방법론은 공연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는 반면 각성적 인지의 성취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잘 짜여진 구조와 정교한 개입에서만 장점이 발휘된다는 얘기는 너무 당연하다.
<거의 새로운 춤>에서도 그런 '중첩'이 목격된다. 공연을 본 누군가가 "전미숙 교수의 자서선 같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긴가민가 'Quasi' 다큐멘터리는 무용수와 다름없이 공연자가 된 안무가에서 가장 뚜렷했다. 여러 중첩 중 이 중첩은 '메타'와 '중첩'이 중첩되는 장면이다.
중첩의 백미는 차진엽의 마지막 무대였다. 심포지엄 형식을 차용한 4개의 춤은 기승전결이 아닌 옴니버스로 구성됐다. 마지막 춤을 춘 차진엽은 모더레이터로 등장한 안무가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수피즘을 화두로 인상적인 무대를 실현한다. 실험적이고 '메타'적인 구성으로 인해 다소 차분해진 관객의 마음은 차진엽이 세마를 추면서, 마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듯 모종의 합일에 한 걸음 다가선다.
순간적이고 덧없는 고양
따라서 차진엽이 미디어 아트와 '중첩'하며 춘 춤은 새로움을 위한 생존경쟁이면서 몸의 원형을 사유하는 '존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세마의 신비주의와 몸의 원형을 파도로 제련한 것 같은 동작은 분열하고 충돌하다가 동작의 희열 속에서 합일하는 고양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 고양은 순간적이고 덧없다. 수피즘이 종파로 살아남지 못한 이유가 여기서 찾아진다. 춤을 추는 이유, 감상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런 춤은 드물게만 볼 수 있고, 동작이 몸의 원형과 합일하는 덧없는 고양의 경험을 무대에 객석에 흩뿌린다.
[안치용 기자]
수피즘(Sufism)은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금욕과 고행, 청빈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 그룹을 일컫는다. 크게 수니파(派)와 시아파(派)로 나뉘는 이슬람에서 수피즘은 종파라기보다는 하나의 태도 또는 수행방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정통 이슬람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은 이유는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신과 직거래하려는 과도한 신비주의 성향 때문으로 전해진다. 터키에서는 신과 합일하는 수행 방법으로, 제 자리서 빙글빙글 도는 '세마'라는 춤을 춘다. 이제는 관광상품으로 전락했지만, 알맹이는 어쨌든 수행과 합일인 셈이다.
▲ '거의 새로운 춤'의 차진엽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5월 26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의 휘날레 파트를 맡은 차진엽이 소개한 춤 또한 세마이다. 대체로 남자가 치마 비슷한 걸 입고 춤을 추는 터키 현지와 달리 이날 공연에서는 여성 무용수인 차진엽이 바지를 입고 자기 식으로 세마를 해석해 비슷한 듯 다르게 무대에서 선보였다. 세마가 이슬람 지역의 관광상품이 되면서 춤에서 신비주의의 흔적이 사라지고 서커스처럼 변모한 반면 차진엽이 공연에서 춘 제자리 돌기 춤은, 신비주의를 구현했다고 하기엔 과하지만 그 언저리를 맴도는 진지함을 선사했다.
'중첩'과 '메타'
<거의 새로운 춤>은 5월 13일~6월 18일 열린 41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 2022)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다. 한예종 무용 실기과 교수인 전미숙이 안무했다. 작품설명은 "불가항력의 외부 구조에 대응하여 춤창작자인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메타인지의 기록"으로 돼 있다.
<거의 새로운 춤>은 5월 13일~6월 18일 열린 41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 2022)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다. 한예종 무용 실기과 교수인 전미숙이 안무했다. 작품설명은 "불가항력의 외부 구조에 대응하여 춤창작자인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메타인지의 기록"으로 돼 있다.
▲ 전미숙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연극, 토크쇼, 무용이 혼합된 다소 실험적 작품이다. 안무가가 직접 공연에 참여하여 비(非)공연 방식의 공연으로 전체 공연에 영향을 미친다. 소설에서 작가가 끼어든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메타'적 방법론은 공연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는 반면 각성적 인지의 성취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잘 짜여진 구조와 정교한 개입에서만 장점이 발휘된다는 얘기는 너무 당연하다.
'메타'와 함께 '중첩'이 이 공연의 중요한 특색이다. 문학 용어로 픽션과 넌픽션이 혼용되는 방식이 무용에 사용됐다.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것은 응당 공연이지만 그들의 삶이 긴가민가 다큐멘터리인 양 묻어난다. 일본 쇼오와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하야시 후미꼬(林芙美子)는 <방랑기(放浪記)>란 소설로 유명한데, 그 내용이 거의 자신의 삶의 기록이어서 소설이면서 수기이기도 하다.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거의 새로운 춤>에서도 그런 '중첩'이 목격된다. 공연을 본 누군가가 "전미숙 교수의 자서선 같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긴가민가 'Quasi' 다큐멘터리는 무용수와 다름없이 공연자가 된 안무가에서 가장 뚜렷했다. 여러 중첩 중 이 중첩은 '메타'와 '중첩'이 중첩되는 장면이다.
공연 제목에서도 '중첩'이 등장한다. '거의 새로운 춤'이란 제목엔 'Desalto Quasi Novus'라는 라틴어 제목이 함께 표기된다. 라틴어 어법을 몰라도 대충 맞는 말처럼 보이긴 한다. 낯선 기운과 학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현관에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시키려는 의도였을까. 분명한 의도는 몰라도 이것은 의미의 층을 두 겹으로 겹쳐놓기에 '중첩'에 해당한다. 정확하게 대응하는 두 개의 언어를 나란히 표기한 <아이튜브(i tube)> 같은 공연 제목의 '병기'와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의 '중첩'은 거의(Quasi) 다르다.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중첩의 백미는 차진엽의 마지막 무대였다. 심포지엄 형식을 차용한 4개의 춤은 기승전결이 아닌 옴니버스로 구성됐다. 마지막 춤을 춘 차진엽은 모더레이터로 등장한 안무가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수피즘을 화두로 인상적인 무대를 실현한다. 실험적이고 '메타'적인 구성으로 인해 다소 차분해진 관객의 마음은 차진엽이 세마를 추면서, 마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듯 모종의 합일에 한 걸음 다가선다.
수피즘과 세마, 그리고 넋 놓고 잠수하기는 무용수가 제시하고자 하였을 원형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형성한다. 이 대목에서 무용수의 일상적 몸짓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며 적절하게 등장한 미디어 아트는, 공연을 고양한다. 수피즘의 소용돌이 춤과 미디어 아트로 표현된 물 속 유영은, 의미를 주장하지 않지만 확고한 의미로 꿰어진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서 유영하는 커다란 크기의 무용수와 무대 위에서 관객 앞에서 춤추는 실물 크기의 무용수는 같은 존재이다. 또한 다른 존재이다. 같고 다름의 이진법의 분투가 예술에서 '새로움'을 활로를 가능케 하고, 존재에서 만일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 의미를 포착하게 만든다.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순간적이고 덧없는 고양
전미숙은 코로나 재앙이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새로운 춤을 위한 창세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춤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무용수들과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에 관한 공론의 장을 펼쳐보고자 한다. 그가 말한 공론의 장이 이날의 공연인 셈이다.
전미숙은 '존재를 위한 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은 '춤의 기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struggle for existence'는 통상 생존경쟁이란 말로 번역하는데, 원래 이 말이 다윈적인 분투와 적응의 맥락에 위치한다고 할 때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 싶다.
▲ 거의 새로운 춤 |
ⓒ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
따라서 차진엽이 미디어 아트와 '중첩'하며 춘 춤은 새로움을 위한 생존경쟁이면서 몸의 원형을 사유하는 '존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세마의 신비주의와 몸의 원형을 파도로 제련한 것 같은 동작은 분열하고 충돌하다가 동작의 희열 속에서 합일하는 고양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 고양은 순간적이고 덧없다. 수피즘이 종파로 살아남지 못한 이유가 여기서 찾아진다. 춤을 추는 이유, 감상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런 춤은 드물게만 볼 수 있고, 동작이 몸의 원형과 합일하는 덧없는 고양의 경험을 무대에 객석에 흩뿌린다.
글 안치용, 사진 대전예술의전당/모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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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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