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책의 시간

2022. 6. 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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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2022 서울국제도서전이 이번 주에 열린다. 도서전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책’이라는 글자, 참 크고 깊구나. 글자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의 걸음이 있다. 걸음이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수평도 있고 수직도 있다. 비스듬한 기울기도 있다. 그러니 관계도 있고 관통도 있다. ‘ㅊ’의 첫 획을 선이 아니라 둥근 점으로 쓴 것은 그것이 사람이자 동시에 해와 달이라는 뜻이겠다. 종성 받침 ‘ㄱ’을 보니, 책은 그 안에 걸터앉아 책 읽을 의자도 가지고 있구나. 책은 책이라는 글자만으로도 책답다. 서울국제도서전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는 책 안에 이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 틀림없으니, 타이포그래피가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책 읽고 싶은 욕구가 유난히 강렬해지는 때가 있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거리가 쌓여 있어 도저히 책을 펼칠 여유가 없을 때가 특히 그렇다. 옛날 중국 위나라의 동우(董遇)라는 자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제자에게 ‘독서삼여(讀書三餘)’를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농사짓고 남는 시간인 겨울, 낮이 지나고 남는 시간인 밤, 맑은 날이 가고 흐리고 비 오는 날, 바로 이런 시간이 책 읽기에 좋은 시간이라는 거다. 책 읽을 시간을 따로 정해줬다기보다는 일하고 바쁜 와중에도 늘 책 읽기를 권한 옛 독서광의 조언에 따라, 나는 할 일을 미루고 책을 펼친다. 그러느라 일은 종종 벼락치기가 되고.

읽다 멈춘 책, 진작 사놓고도 손대지 못한 책 한 권을 꺼내 자리 잡고 앉는다. 언제든지 밑줄 긋고 내 단상을 적어넣을 수 있도록 손닿는 곳에 연필을 둔다. 찬찬히 목차를 음미하고 서문을 읽는다. 책장을 넘기다가 그 책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꽂히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의 설렘과 반가움. 아름답거나 날카롭거나 때로는 관능적이고 영감에 찬 문장과 필연처럼 조우할 때의 기쁨. 환호하며 나는 책을 읽는다. 그렇게 책을 읽는 시간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돌아보면 한 시절의 애인처럼, 구원병처럼, 뜻밖의 방문객처럼, 내 인생 곳곳에 책이 놓여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시절마다 그 시절에 합당한 책을 만났다. 시대를 관통하는 책들이나 나를 관통하는 책들. 그런 책들만으로도 한 사람의 생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책 읽는 자들은 안다. 내 책들이 대개는 장르별, 분야별, 작가별로 책장에 배열돼 있는 것과는 달리, 그런 책들은 내가 가장 아끼는 책들로만 채워진 ‘특별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다.

요즘도 곳곳에서 독서토론회가 열리고 동네마다 힙한 독립서점이 생겨나지만, 서점이 오롯이 서점이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이 되는 것은 좀 서운한 일이다. 서점의 복합문화란 대개는 인스타 감성에 헌정돼버리고 만다. 고백하건대 나도 책을 꺼내 들기보다는 넷플리스나 유튜브에 접속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봐야 할 영상은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보지만, 봐야 할 책은 자꾸 뒤로 미룬다. 영상을 보는 것이 주로 눈의 행위라면, 텍스트를 읽는 것은 눈이 아니라 두뇌의 행위이고 몸이 총체적으로 동원되는 일이어서, ‘복세편살’의 시대에 책을 읽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밤이 되든 비가 오든 삼여(三餘)의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서울국제도서전을 주최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라는 캠페인을 펼쳤을까.

책과 관련해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차서일치’라는 말. 책을 빌릴 때와 돌려보낼 때 감사의 뜻으로 술 한 병을 함께 보내던 선인들의 관례를 이르는 말이다. 구하기 어려운 책도 애써 구하고 함께 돌려보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번 주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서 또 한 시절을 함께 해줄 새로운 책들과 만나보자. 십중팔구 책은 안 읽고 날이면 날마다 술병만 곁에 두는 자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생이 그 안에 있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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