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맛 본 특별한 겨울차

민영인 2022. 5. 3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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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인 기자]

깊고도 웅장한 지리산 골짜기는 오랫동안 수많은 애환과 삶의 흔적들을 비밀스럽게 간직해 오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너른 어머니의 품과 같은 이곳으로 조용히 들어와 지내는 재야의 숨은 고수들도 많다. 하지만 지리산 속에 있는 이런 고수들은 범접할 수 없기에 어떤 인연에 의해서만 만남이 이루어진다.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거림계곡으로 들어서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길과 삼신봉 청학동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좌측 청학동 방면으로 다리를 건너 조금만 가면 우측 길가에 아주 작은 글씨의 '법성사' 팻말이 서 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입구도 뚜렷하지 않아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시작부터 경사도가 심해 운전 실력이 조금 모자라면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기를 권한다.

겉모습은 여느 절간과 같은 그런 사찰의 모습이 아니다. 그 흔한 탑도 없고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 부는 대로 소리를 내는 풍경(風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스님 스스로가 말하듯이 그냥 '토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비닐로 막은 외벽으로 이 지리산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산신각과 탱화 산신각의 외관, 탱화가 특이하다 해서 들어갔더니 마치 범선스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 민영인
 
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는 스님의 첫인상이 범상치 않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에 길게 기른 흰수염은 영락없는 넉넉한 지리산을 닮은 도인의 모습이다. 범선(梵仙) 스님은 주로 양산부근에서 활동하시다가 약 15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았다. 스님을 지리산으로 이끈 것은 차였다.

일반인들이 스님과 차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한 조선시대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일 것이다. 여기 범선스님은 오랜 기간 차를 공부하며 초의선사의 차맥(茶脈)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부처님 말씀이 아닌 차에 집중되었다. 녹차로부터 시작하여 직접 제조하고 소장하고 있는 차를 종류별로 우려내어 맛을 보여주고 각각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최근 현대인들이 많이 먹는 대용차 또는 약차라고 하는 무차나 뽕잎차, 감잎차 등 화제는 무궁무진하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고, 살청(殺靑, 뜨거운 열로 산화효소의 활성을 파괴하는 것), 유념(揉捻, 비비기)의 전문적인 제다(製茶)의 방법론까지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 동차우려내기 범선스님이 동차를 시음해보라고 우려내고 있다.
ⓒ 민영인
 
이쯤에서 스님을 찾아온 목적인 '동차(冬茶)'에 대해 물었다. 일반적으로 찻잎은 우전(곡우 전후)에 따서 만든 세작을 최고로 인정한다고 알고 있다. 경우에 따라 초가을까지도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겨울차는 이름 그 자체마저 생소하다. 먼저 동차의 잎부터 보여주었다.
생김새부터가 보통의 녹차와는 확연히 다르고, 마치 마른 나뭇잎과 같다. 동차는 스님 자신이 스스로 개발한 차라고 말한다. 찻잎은 한겨울 눈이 올 때 따는데, 아무거나 막 따지 않고 반드시 큰 바위 옆에 있는 것만 채취한다. 차나무는 상록수이지만 너무 추우면 냉해를 입는다. 그런데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열기가 있기에 바위 옆 찻잎을 이용한다.
 
▲ 동차 우려내기 한 겨울 눈내린 후 딴 찻잎으로 자연건조시켜 만든 동차
ⓒ 민영인
 
제다법도 일반적인 녹차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채취한 잎은 어떠한 인공적인 열도 가하지 않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아주 느리게 수분을 증발시킨다. 밤에는 지리산의 이슬과 서리를 맞히고, 낮에는 그늘에 들여놓아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듬해 곡우 무렵이면 동차가 완성된다. 자연적인 제다 과정을 거쳐서 그런지 맛과 향은 깊고도 은은하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주 미묘한 부드러움이다.
 
▲ 동차잎 범선스님이 개발한 동차. 마치 마른 나뭇잎과 같은 모습. 과연 차맛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 민영인
 
마지막으로 발효차인 '떡차'도 시음해 봤다. 만드는 과정은 찻잎을 빻아서 떡판 같은 곳에 넣고 압축한 다음 메주 띄우듯이 하면 서서히 발효가 되면서 겉에는 하얀 곰팡이가 핀다. 이것을 마지막 손질로 '맛내기' 작업을 거치면 떡차가 완성된다.

마무리를 하며 스님이 마신 차 중에서 어떤 게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오래전 중국 윈난에 거주할 때 보이차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나는 발효차가 좋았다고 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조만간 떡차를 만들 것이니 그때 와서 직접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한다.

스님이 주신 명함으로 눈길이 갔다. "오유지족(吾唯知足 : 나 오직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이 스님에게 딱 맞는 글귀이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 요건만 갖춘 지리산 비탈 토굴에서 15년간을 지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것은 아마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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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겔 위에서 구도자가 되다'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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