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는 시인 문태준 "시외버스 하염 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좋다"
시가 무엇인지,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시들이 그토록 다채로운 이유다. 시는 왜 쓰는지로 질문을 좁히면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적어도 서정시인 문태준에게 시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은 왜 늘 가난한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인지, 시인이 직접 경험한 삶의 비탄에서 태어나, 매일매일 커다란 빚더미에 눌린 채 밥과 돈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까지 가 닿아야 시라는 것이다.
문씨가 최근 펴낸 산문집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마음의숲)에 실린 '시인의 일'이라는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산문집과 엇비슷한 시기에 펴낸 문씨의 새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창비)는 말하자면 그런 생각의 시적 실천 같은 것일 게다. 시집의 표제시 '아침은 생각한다'는 '아침'이라는 물리적 시간대를 시의 화자로 내세워,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이고 시장에 행상 나가는 어머니를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을 투영했다. 능동화된 아침이 세상을 걱정한다.
그런데 시집 안에 실린 74편 가운데 세상의 모든 일을 걱정하는 박애 취향의 시편은 불과 몇 편 안 된다. 물기 어린 감성을 타고난 듯한 이 시인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그저 대자연이 하는 일이나 내면의 사소한 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한 시편들이 대부분이다. 자칫 2004년 시집 『맨발』의 표제작 '맨발'이나 2006년 시집 『가재미』의 표제작 '가재미' 같이, 즉각적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시편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이 날콩처럼 비"린 어느날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린 채 돌아와 "웅크려 누운 (…)/ 사다리처럼 홀쭉하게 야윈 사내"에게 "물그릇 같은 밤"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圓光)"이 떨어진다는 시의 한 구절이라도 마주치는 순간('초저녁별 나오시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집에는 백석도, 윤동주도, 미당 서정주도 언뜻언뜻 들어와 있다. 무엇보다 제주도가 보인다. 시인이 재작년 아내의 고향 제주도에 내려와 정착한 탓이다. 아내의 옛집 터에 그림처럼 아담한 거처와 카페를 마련하느라 체중이 빠졌다는 시인은 흡사 "생활하다가 나와서 돌구멍 같은 눈을 뜨고 밤새 빗소리 듣"는 시 구절 속 모습이었다('가을비 속에').
-체중이 준 것 같다.
"한 8㎏ 빠졌다. 경사진 밭에 터를 닦아 집과 카페를 짓느라 일이 많았다. 무너진 밭담(밭의 돌담)을 다시 세우고 나무도 심었다."
-바뀐 환경이 시에 드러난다.
"내 고향 김천은 만산중(萬山中)이라는 표현처럼 겹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새 둥지처럼 오목한 곳이다. 여기 제주도는 큰 산 한라산이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막힘 없이 열려 있다. 자연의 움직임이 굉장히 활발한 곳이다. 구름의 이동이 육지와 다르다. 왕성한 생명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니 내 관심사와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대양이나 바람 같은 것들은 아직 내 시 안에 안 들어온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흙과 노동, 노동하는 몸 같은 것들은 이번에 좀 선보였다."
-제주살이가 쉽지만은 않나.
"생각보다 바람 피하기가 힘들다. 바람만 좀 잦아들면 참 좋은 곳인데. 불가항력적이다, 이기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 상황과 관련 있는지, 마음에 대한 관심을 시와 산문에서 자주 내비쳤다.
"평소 마음에 두거나 뜻하는 것, 심의(心意)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바뀌게 되는 일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심의라는 게 대부분 어떤 배려나 자애 같은 거다. 하심(下心,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불교 용어, 문태준은 제주 불교방송 PD다), 자애, 친절, 이런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좀 한 것 같다."
"너무 도인인 척 하는 거 아니냐"고 슬쩍 찌르자 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뭘 몰라서 한가한 게 좀 생길 수 있다"고 받아넘겼다. 이 정도 견제에 움찔할 시인이 아니다. 그러면서 꺼낸 얘기가 불편하지만 평온한 제주살이 예찬론이었다.
"내가 사는 애월에서 제주로 나가려면 한림에서 출발해 여러 동네를 거쳐 오는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버스가 정해진 시간에 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조바심 없이 그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나는 너무 좋은 것 같다. 자연을 새롭게 경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작약의 구근 같은 거라도 얻어 심어 놓고 싹이 움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느날 싹이 올라왔을 때 드는 경의(敬意), 이런 것들이 너무 충분히 좋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시인의 방법을 알겠다. 스스로 잘 사는 모습을 시로써 보여주는 게 시인이 세상을 위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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