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글로벌 머니] 97% 폭락 '테라 코인' 권도형..혁신가냐 희대 사기꾼이냐

강남규 2022. 5. 3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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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규 기자

권도형(30) 테라폼랩스 최고경영자(CEO)의 테라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테라USD는 개당 1달러여야 한다. 하지만 30일(현재) 가격은 1달러에서 97% 정도 추락한 0.027달러 안팎에서 거래됐다. 더 이상 ‘안정적인 코인(stable coin)’ 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격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자산과 결제수단으로 널리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 개발됐다.

가격이 추락한 바람에 권 씨는 ‘혁신가’와 ‘희대의 사기꾼’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모양새다. 애초 그는 발행자가 금이나 미국 달러·국채를 담보 자산으로 보유할 필요가 없는 코인을 꿈꿨다. 대신 알고리즘만으로 ‘1테라USD=1달러’가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내놓았다. 놀라운 상상이다. 알고리즘은 사실상 0과 1로 이뤄진 ‘일종의 절차’일 뿐이다. 디지털 절차가 가치의 원천이란 얘기다.

「 “달러·국채 담보 필요없는 코인 꿈
300년 전 미시시피 금융버블 연상”
금 뒷받침 없이 종이돈 찍은 존 로
마구 찍어내다 붕괴, 사기꾼 추락

테라, 실물자산 없이 알고리즘 발행
이번 사태로 코인 한계 분명해져

존 로, 18세기 재정 파탄난 프랑스서 실험

권 씨의 혁신(?)은 가상자산 세계의 숙원을 해결해줄 듯했다. 다른 스테이블 코인은 미국 달러나 국채 등을 바탕으로 발행된다. 애초 국가와 중앙집권적인 금융 시스템을 비판하며 등장한 가상화폐가 정작 가치는 국가의 것(법정화폐나 국채)에 뿌리를 뒀다. 논리적으로 자기부정이다. 암호화폐 지지자들이 완벽한 홀로서기를 꿈꾼 이유다. 이런 염원에 권 씨는 알고리즘만으로 가치를 뒷받침하는 아이디어로 응답했다. 가상자산 세계의 스타인 마이클 노보그라츠 갤럭시디지털 최고경영자(CEO) 등이 환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테라USD 가격이 추락했다. 권 씨의 혁신이 평가절하됐다. 그 바람에 권 씨의 행위가 사기인지 아닌지, 미국 정부 등이 어떤 사법처리를 할지 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반면 영미권 통화이론가들은 최근 기자와 주고받은 e메일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최근 6개월 새에 97% 추락한 테라USD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던 존 우드 웨이크포레스트대 교수는 기자와 주고받은 e메일을 통해 “권도형의 테라 프로젝트가 존 로(John Law, 1671~1729년)의 미시시피 버블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1719년 프랑스 파리를 뒤흔든 금융 거품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이론가인 로가 금태환이 안 되는 종이돈으로 일으켰다.

로는 1705년 펴낸 『돈과 상거래에 대하여(Money and Trade Considered)』에서 “돈이란 그저 교환의 수단일 뿐”이라며 “가치를 지닐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돈의 구매력은 금이나 은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는 그 시절 통념(metallism)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화폐이론 구조 측면에서 보면 스테이블 코인이 굳이 달러나 국채 등을 바탕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권도형씨의 생각과 같다.

로는 자신의 화폐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고향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허튼소리라며 무시했다. 결국 그는 여러 왕위계승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재정이 파탄 상태인 프랑스를 실험무대로 선택했다. 그는 파리로 건너가 18세기 초 프랑스 실권자인 오를레앙공 필리프2세의 귀에 국가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 있다고 속삭였다.

로의 시스템 핵심은 국채를 식민지(현재 미국 미시시피 지역 등)와 독점적으로 교역하는 회사의 주식으로 스와핑하는 것이었다. 주가가 오르면 적은 주식으로 더 많은 국채를 사들일 수 있었다. 주가를 오르도록 하는 장치가 바로 순수 종이돈이었다. 로는 은행을 설립해 종이돈을 마구 찍어냈다. 요즘 양적 완화(QE)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종이돈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덕분에 국채를 주식으로 바꾸는 작업이 한동안 잘 이뤄졌다. 하지만 1719년 끝내 붕괴했다. 로는 순식간에 혁신가에서 사기꾼으로 추락했다. 이탈리아 북부로 도망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숨졌다. 그의 실패를 계기로 종이돈 시스템의 필요충분 조건(현대 국가)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조건이 충족되기까지 250여년이 흘렀다. 마침내 1971년 닉슨 쇼크(금-달러 태환중단)를 계기로 실현됐다. 우드 교수는 “닉슨 쇼크 이후 로가 복권됐다”며 “요즘 그는 ‘종이돈의 아버지’ 또는 ‘QE의 개척자’로 재평가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알고리즘이 국가 대신할 수 있어야 가능

그렇다면 권 씨도 먼 훗날 재평가될까. 그럴 가능성 자체가 없지는 않다. 다만, 세계적인 통화이론가인 영국 런던정경대(LSE) 찰스 굿하트 교수(경제학)는 기자에게 띄운 e메일에서 “로의 실험 이후 250여년 동안 어떤 개인이나 기업이 대체하기 어려운 ‘현대적인 국가(정부) 시스템’이 구축돼, 금의 뒷받침 없이도 종이돈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권도형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알고리즘이 국가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 굿하트 교수는 “국가는 화폐단위를 정해 국경 내에서 모든 회계장부를 자국 통화단위로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다”며 “가까운 미래에 테라나 비트코인 단위로 개인과 기업, 정부의 회계장부가 모두 작성되는 그 날 권 씨는 ‘21세기 존 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테라 사태를 계기로 가상화폐 지지자의 과제가 더욱 분명해졌다”고 했다. 30대 한국인의 상상력 때문에 가상자산 지지자들이 앞으로 풀어야 할 근원적인 문제가 드러난 셈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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