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이고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동 학대를 당하던 소녀(김시아)의 손을 잡아주고, 서로가 가족이 되길 택한 평범한 여성(한지민)이 등장하는 영화 〈미쓰백〉(2018)을 보며 상상한 적 있다. 우리가 누군가와 가족이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 아닐까? 나 또한 핏줄이 섞이지 않은 다른 이에게 가족 비슷한 게 돼줄 수 도 있을까? 베테랑 편집자이자 출판사 ‘또다른우주’ 대표인 백지선은 결혼하지 않은 ‘비혼’ 상태로 2010년과 2013년 두 여자아이를 차례로 입양했다. 그가 펴낸 책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는 지금 이 가족을 가장 담백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제목이다. 놀라운 우연이 겹치고 겹쳐 한 가족이 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세 명의 여성들. 그리고 그 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는 백지선 대표는 말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가족을 갖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원가족과의 자연스러운 교류, 부모의 관계 변화에 따른 불안정성이 없는 점 등 서문에 비혼 입양의 장점을 밝힌다
한부모가족인 비혼 입양 가정은 결핍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오히려 편견의 원인인 한부모가족이라는 사실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밝히며.
비혼 입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30대 중반인 내 주변에도 사유리 씨의 사례 이후 냉동 난자 보관을 실제로 실천한 이들이 늘어난 것처럼 가시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06년 12월 30일 자로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 시행규칙’의 양친 자격조건에서 ‘혼인 중일 것’이 삭제됐다. 부모가 필요한 아이,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했던 법이 개정된 것이다. 36세였던 2008년 이 사실을 알게 됐고, 2010년 초 입양 상담을 신청했다.
법적 가능 여부와 별개로 사례가 많지 않은 만큼 직접 부딪히며 알아볼 일이 많았을 텐데 어디서 추진력을 얻었나
원래 보호 대상 아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입양이 되지 않아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결혼 여부를 떠나 입양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이혼한 사람들이 부부가 아닌 사람도 입양을 가능하게 해달라고 올린 글을 보며 공감도 하고.
원래 연장아(신생아가 아닌, 비교적 많은 나이에 입양된 아이) 입양을 생각했다가 신생아 입양을 택했다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란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문가 의견을 들어보니 부모와 아이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생후 1년이 중요하더라. 종교기관이나 보육원에서 입양을 주선할 때는 입양 전문가가 부재하기도 한데 나는 전문 지식이 많은 상담사와 만났다. 그 또한 미혼 여성이었기에 내 입양을 긍정적으로 본 것 같다.
어떤 담당자를 만나느냐가 입양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미칠 것 같다. 노하우가 있는지
기부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오래 지켜본 아동보호 시설이나 종교적으로 관련된 기관이 있다면 먼저 살피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나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홀트아동복지회(이하 홀트)를 찾아갔다. 홀트는 오래전부터 입양 대상 아이를 시설에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 위탁모가 가정에서 돌보았고, 자체 소아 의원도 갖추고 있는 등 그간 쌓인 노하우가 풍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입양기관의 대명사처럼 되면서 과도하게 비난을 받아 안타까웠다. 대표 또한 실제로 자신이 입양아를 키우는 소신 있는 사람이고, 해외 입양의 경우 2년에 달하는 입양 절차를 밟는 과정은 물론 아이를 돌보기 위해 몇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데 아‘ 이 팔아서 돈 번다’는 비난을 받는다. 우리 아이들의 입양을 주선해 준 사회복지사의 경우도 악화된 여론에 시달리다가 업무를 바꾸어 지금은 홀트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다. 입양기관이 소속된 복지재단들은 여러 복지사업을 전개하는데, 현재 입양사업 비중을 줄이고 미혼모 지원이나 아동보호 사업을 강화하는 추세다.
사회가 핏줄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관계에 대해 여전히 정서적으로 닫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해관계에 따른 여론전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불행한 해외 입양인들의 사연이 알려지고 그들의 활동과 국내 입양 반대세력이 결합하면서 2010년대부터 입양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한때는 연예인 부부가 홍보대사를 하기도 했던 입양 홍보 또한 위축되거나 중단됐다. 출산율 자체도 낮아졌지만 현재 입양률은 급감하고, 미혼모나 한부모가정이 아이를 직접 키우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태다. 그런데 미혼모가 아이 양육을 경제적·개인적 이유로 포기해서 발생하는 보호대상 아동보다 친부모의 아동 학대, 방임, 유기로 양육자와 분리된 보호대상 아동 수가 훨씬 많다. 그럼에도 정부조차 친권을 쉽게 건드리지 못하다보니 끔찍한 학대가 여러 번 반복되고 난 뒤에야 겨우 부모에게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는 수준이다. 이런 아동들은 부모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입양이 거의 불가능하다.
입양 가정을 위한 제도적 지원은
한달에 아이당 15만 원의 지원금이 나오던 것이 2022년 20만 원으로 올랐고, 의료 급여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입양 가정은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보고 결정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 지원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장애아를 입양했을 경우 더 많은 비용을 지원받지만, 그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책을 읽기 전에는 이책이 ‘금수저’ ‘엘리트’ 여성의 특수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나 부모님의 불행한 결혼생활, 그럼에도 서로 버팀목이 돼준 4남매 이야기 등 개인사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31세, 방 한 칸을 전세로 얻어 독립한 뒤 38세에 첫째를 만나기 전까지 혼자 살았다. 혼자 사는 삶은 좋았지만, 젊고 바쁜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만약 성인이 돼서도 가족과 계속 산다면 내 가족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여전히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동갑 친구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구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엄마와 관계를 회복하고, 형제들과 재밌게 살면서 원래 가족을 복원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를 극진히 돌봤으니 엄마를 구해내겠다는 것은 실패했으나, 아이를 입양하고 양육에 관한 도움을 받으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는 많이 나아졌다. 원래 가족과 새롭게 이어지는 대신 결혼을 통한 또 다른 가족을 꾸렸다면 근본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허전함이 내 안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와 함께 살며 얻게 된 것으로 ‘수십 년의 세계를 뛰어넘어 다른 생명체와 아주 가까이 연결된다는 감각’을 꼽았다. 생각지 못한 시각이었다
우리는 성인이 되고 나면 비슷한 상황, 또래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나와 다른 산업에 종사하거나, 연령대나 배경이 다른 사람을 만나며 인간으로서 얻게 되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사회학이론이 있다. 워런 버핏의 공식 전기인 〈스노볼〉을 편집했는데, 자영업자로 자수성가한 할아버지, 주식 브로커였다가 공화당 의원이 된 아버지와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일찍 경제에 눈뜬 것이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비결이었다. 역으로 우리 또한 20~30년 어린 존재와 가까이 지내면 알게 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최근 13세, 10세 딸들과 지내며 알게 된 것은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웃찾사〉 클립이 유튜브에 업로드되면서 아이들이 그걸 재미있어 한다는 게 신기했다. 최신 트렌드도 확실히 빨리 알게 된다. 〈오징어 게임〉은 19세 관람가지만 패러디 영상이 틱톡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초등학생 사이에서 먼저 인기였다. 로‘ 블록스’도 아이들이 먼저 이야기해서 나는 일찍 알았다. 그때 주식도 샀다면 좋았겠지(웃음).
공개 입양이 필수임을 책에 분명하게 밝힌다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기도 하고, 지금도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입양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인데, 입양 자체를 쉬쉬하고 부정적인 것처럼 대하면 정체성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미국에서 대대로 살아온 흑인들이 더 쉽게 성공할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정치 상황 때문에 최근 미국으로 이민 온 소수 집단 흑인이 더 빠르게 주류 사회에 진입한 이유를 다룬 책 〈트리플 패키지〉를 보면 나의 가능성을 믿는 우‘ 월의식’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자라며 분명히 편견에 부딪히겠지만 그게 절대로 약점은 아니라는 것, 더 강한 존재가 되는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상황을 공유하는 자매가 있다는 것 또한 분명 힘이 될 것이다.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할 것이다, 남성 보호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등 입양과 한부모가정을 둘러싼 일반적인 우려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는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강력한 연대는 갈수록 막강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라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나
아이 양육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을 많이 우려하는데, 알다시피 아이가 있는 사람이 악착같이 돈을 번다. 목적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내 자식,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도전하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내공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결혼했지만 양육 부담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기 힘든 것은 정부 지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바뀌지 않는 부모의 노동 현실 때문이라는 지적에 공감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대부분의 직장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는 남성들의 육아휴직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이가 있는 여성은 비율적으로 회사에서 항상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럼 국가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회사에서 이들은 꼴 보기 싫은 존재인 거다. 함께 일하는 동료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상황을 이해하려 하다가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싫을 수밖에 없다. 남성의 육아휴직이 기본이 되면 가정친화적 사회로 변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른 입양 가정과의 교류는
워킹 맘으로 살다 보니 그런 모임은 전혀 하지 못했다. 모임 참석자의 상당수가 종교적 배경을 가진 경우가 많다 보니 무교인으로서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입양 문화는 태생부터 종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관련이 깊다. 임신중지를 막아야 한다는 신념, 모든 아동이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라야 한다는 신념이 상충하고, 과거에는 주로 입양을 권장하는 쪽이었다면 요즘은 미혼모가 직접 키우도록 최대한 지원하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나는 여성이 임신중지나 입양, 양육 여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일회성이라도 입양 관련 행사나 모임에 참석해도 좋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된 싱글 여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입양’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이들에게 권한다면
지금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돼 있다 보니 아이가 없는 사람은 나 또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양육뿐 아니라 간병 등 모든 돌봄 노동이 50~60대 특정 연령층의 여성에게 편중돼 있다. 성별이나 연령과 상관없이 가족이든 친척이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봄을 제공하며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모든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본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일주일만 입원해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젊고 에너지가 있을 때, 평생 나와 살아갈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비혼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경제적인 것은 고민하면서 미래의 가족에 대해 아무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식이 한두 명밖에 안 되는 요즘 시대에 비혼인 딸이 늙은 부모를 책임지다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막막해하는 걸 본다. 꼭 입양이 아니더라도 최근 이야기되는 생활동반자법처럼 평생 나와 살아갈 사람을 준비하길 바란다.
입양 이후 어떤 사람이 된 것 같나
과거에는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결정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있는 지금, 내 인생의 방향은 확실하게 정해졌다. 그냥 지금 내 현실을 열심히 살면 된다는 엄청난 안정감이 있다.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