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새의 선물』 100쇄.."사랑해주신 독자들이 큰 배후세력"

신준봉 2022. 5. 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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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은희경씨의 1995년 첫 장편 『새의 선물』이 100쇄 개정판을 냈다. 현대의 고전이다. [사진 문학동네]

집단과 이념이 득세했던 1980년대가 지나고 개인과 취향이 우선순위로 떠오른 1990년대 한복판. 복고풍 소설책 한 권이 도착했다. 열두 살 소녀 진희의 눈을 빌려, 60년대와 90년대 한국사회의 허상을 신랄하게 까발린 은희경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이었다. 소설책은 무섭게 팔렸다. 95년 책을 출간하며 출판사 문학동네의 당시 강태형 대표는 "10만 부가 팔리면 차를 사주겠다"고 호언했다고 한다. 눈 밝기로 소문난 출판사 편집위원(주로 문학평론가들)들이 옆에서 웃었다. 실현 불가능한 농담으로 여긴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 은희경씨는 "오래지 않아 실제로 차를 선물 받았다"고 했다. 30일 『새의 선물』 100쇄를 기념한 개정판 출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밝힌 일화다.
100쇄는 100만 부 판매와 느낌이 또 다르다. 미지근하지만 더욱 꾸준한 사랑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훈의 『칼의 노래』 등 몇 안 되는 소설책들만 포함된 은밀하면서도 영예로운 클럽이다. 이 소설을 쓸 당시 30대 초짜 작가였던 은희경은 어느덧 한국 문단의 대표 얼굴로 성장했다. 신생 문학동네 출판사 역시 대표적인 문학출판사로 자리 잡았다. OTT 콘텐트가 판치는 세상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새의 선물』 100쇄 기념 개정판 표지


은씨는 "27년간 사랑받았다는 것은 소설을 통해 던졌던 질문에 독자들이 꾸준히 반응했다는 얘기인데, 그런 독자들이 큰 배후세력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새의 선물』은 무슨 질문을 던졌다는 것일까. 좋은 문학작품은 뻔한 결말 대신 질문의 형태인 경우가 많다.
은씨는 "90년대 당시에는 소설을 좀 더 독하게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독기 어린 태도가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쉽게 말해, 가능하면 독한 표현을 써야 사람들이 어떤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고 여기는 시절이었다는 얘기다. 독한 질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소설의 어떤 챕터에서는 여성 문제, 다른 챕터들에서는 계급 문제, 군사 독재 문제들을 건드렸다. 그런 문제들에 사람들이 익숙하게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생각이 사실은 사람들을 부조리한 오답에 주저앉힌다는 게 소설에서 던졌던 질문이었다."
20여 년 전 소설가의 문제의식은 이제는 해소된 걸까. 여전히 문제라고 느낀다면 『새의 선물』은 아직도 생생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은씨는 "100쇄 개정판을 내면서 소설의 뼈대, 큰 줄기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요즘 현실 인식에 비춰 편견이 배어 있는 단어나 표현은 손질했다. 앉은뱅이책상, 벙어리장갑 등 장애인 비하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 말이다. 불륜 같은 표현도 '공인되지 않은 관계'로 고쳐 썼다. 소설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적나라한 욕설은 그대로 뒀다. 당대, 그러니까 90년대 현실을 드러내되 어떤 수위까지 소설책에 남겨야 하는지 결정하는 문제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가 은희경씨는 한국 문단에서 손꼽히는 왕성한 현역이다. 30년 가까이 사랑받고 있다. [사진 문학동네]

100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독자들이 『새의 선물』을 집어 든 이유는 백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 이전까지 한국소설이 제시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형을 선보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외치는 소녀의 당돌함, '환부와 동통을 분리하는 법'을 통해 언제나 상처 입기 쉬운 스스로를 보호하는 냉소적인 자아 같은 것들 말이다.
초설 첫머리 제사(題辭)로 배치한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1900~1977)의 시 '새의 선물'은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무슨 뜻인가. 은씨는 이렇게 답했다.
"언제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게 시의 매력인 것 같다. 이 시를 접하는 순간 소설에 딱 맞는 시라고 생각했다. 해바라기 씨앗의 상징성, 그 씨앗을 거부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희망과, 동시에 그 희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긴장감을 동시에 느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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