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노조, 임금피크제 폐지·소송 나선다는데, 무효화보다 삭감률 쟁점 될 듯
대법원의 임금피크제 판결을 계기로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임금피크제 폐지 투쟁이 일 조짐이다. 대법원은 26일 정년연장과 같은 합리적 이유 없이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데 대해 제동을 걸었다. 무턱대고 근로자의 임금을 깎는 것은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취지다. 그렇다고 임금피크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임금체계 중 하나로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
노조는 이런 취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피크제 폐지를 위해 소송전도 불사한다는 각오다. 그러나 소송에 나서더라도 법원이 임금피크제의 취지와 제도 자체를 인정한 이상 이를 뒤집고 무효로 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임금피크제 정당성 뒤집기 힘들어…삭감 규모 조정 나설 듯
이 때문에 노조가 임금피크제 무효화 투쟁에 나선다고 하지만, 실제 초점은 실질적인 임금 보장을 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임금 삭감 규모를 축소하는 형태다. '과도한 삭감'은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제시한 임금피크제의 효력 기준 중 하나다. 따라서 임금피크제 무효화보다 삭감률을 둘러싼 노사 간 갈등과 조정작업이 확산할 수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마자 회사 측에 '임금피크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노조는 회사 측의 입장을 들은 뒤 삼성그룹 전체 노조와 연대해서 향후 대책을 논의할 방침이다.
삼성전자 노조도 "지난해부터 임금피크제 폐지를 회사에 요구해왔다"며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폐지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삼성그룹 노조의 경우 대체로 조합원 수가 전체 직원의 2~5% 수준으로 적어서 회사 내에서 노조의 요구가 탄력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다. 자칫하면 일반 직원으로부터 "떼쓴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조의 움직임 이면에는 국내 최대 기업이라는 상징성을 활용해 다른 기업으로 임금피크제 폐지 이슈화를 확산하고, 외부의 동력을 내부 압박으로 견인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삼성, 2020년 임금피크제 판결 받아…효력 인정 판결 잇따라
삼성은 이미 노조와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소송전을 경험했다. 이 소송에서 회사가 승소했다. 2020년 11월 울산지법은 삼성SDI 근로자가 낸 임금피크제 무효 소송에서 "만 55세였던 정년을 만 60세로 연장하면서 없던 연령구간에 대해 새로운 임금제도(임금피크제)를 신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임금피크제는 정당한 임금체계로 근로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판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남부지법도 지난 27일 한국전력거래소 직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회사 승소로 판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소송전을 벌여도 실익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 대안으로 삭감 규모 축소로 눈을 돌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부분 기업은 정년을 연장하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업무량이나 업무형태, 근로시간, 직무를 조정한 경우는 드물다. 특히 연구직과 같은 전문가로서의 직무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경우는 삭감 논란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이 문제가 임금피크제 무효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슈화하면 회사 내 갈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이 외면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기업 삭감 최대 30%선…"삭감률 1/3 이상, 사회통념 어긋나"
유준환 LG전자 사무직 노조위원장은 "아직 방침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 등의 고충을 청취한 뒤 폐지를 배제하지 않되 삭감 시작 연령을 높이고, 삭감률 조정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LG 전자는 58세부터 3년 동안 10%씩 임금을 깎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당초 55세이던 삭감 시작 연령을 57세로 늦추고, 삭감 규모도 매년 5%씩 줄이도록 조정해 적용하고 있다. LG 전자보다는 총 삭감 규모가 작다. 현대자동차는 59세에 임금을 동결하고, 정년퇴직 연령인 60세에만 10% 깎는다.
이처럼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은 대체로 정년(60세) 이전 2~4년 동안 임금을 삭감하고, 그 규모도 매년 5~10%로 총 삭감률이 삭감 이전에 비해 최대 30%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다.
대법원이 판결문에서 제시한 기준 중 하나인 '과도한 삭감'을 두고 법리적으로 적정한 삭감률을 내놓기는 힘들다.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 사정과 외부 환경 등을 고려해서 삭감률의 적정선을 찾아야 하는 데, 이때 중요한 고려사항은 '사회적 통념'이 될 전망이다. 통상임금을 비롯한 대부분의 임금 관련 판결에 등장하는 기준이다.
정년퇴직자가 소송 이기면 3년 치 임금·퇴직금 재산정해서 줘야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대학원장)는 "삭감되기 전 임금을 기준으로 3분의 1 이상 임금을 깎으면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 삭감 기간이 상당수 기업이 적용하는 기간보다 길거나 삭감 수준이 3분의 1 이상이면 갈등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럴 경우 노조가 소송에 나서지 않더라도 근로자가 정년퇴직을 한 뒤 소송을 제기하면 '과도한 삭감'을 두고 공방이 벌어질 수 있다. 임금 채권 유효기간은 3년이다. 따라서 퇴직한 근로자가 승소하면 3년 치 임금과 퇴직금을 재산정해서 지급해야 한다. 특히 근로자 승소로 판결이 나면 해당 회사는 임금피크제 무효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기업으로선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따라서 기업도 삭감률 재산정에는 노조와 협의·협력할 가능성이 크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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