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포럼] 젠더갈등 넘어 자기다움으로

2022. 5. 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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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필자는 의과대학 졸업반이었다. 느닷없이 교육 담당 교수가 내년도 인턴 모집 요강 발표를 하며 전체 경쟁률에 따라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동일 비율을 적용해 선발하겠다고 했다. 우리 동급생은 여학생이 전체 정원의 10% 정도였는데 입학할 때부터 여자가 너무 많다고 조만간 우리 대학이 ‘00여자의과대학’이 될까 우려된다는 이야기를 재학 6년 동안 내내 들어왔던 터였다. 지금으로 보면 고작 10%인데 무슨 이야기이냐 하겠지만, 그 당시는 1년에 한 두 명 여학생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학년이 태반이었으니 그땐 그저 많아서 놀랍다는 이야기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은 사안이 다르다 싶어 대표를 뽑아 면담을 하러 갔다. 이유를 묻는 우리 여학생 대표들에게 성적대로 선발을 하면 여학생 대부분이 합격할 것이고, 그 숫자만큼 가정을 책임져야 할 남자들의 앞길을 막을 것이 뻔해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냥 벽이었다. 두드려도 미동도 하지 않는 두껍고 높은 벽,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벽이었다.

우리는 계획을 짰다. 비록 숫자는 적어도 사회에서 중견 여의사로서 활동하는 여성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서명을 받기로 했다. 미국·캐나다 등 외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제외하니 고작 10여분이었지만 선배님들은 단순 서명 뿐 아니라 엄청난 격려를 보내 주셨다. 덕분에 우리 동기 여학생들은 다음 해 모두 모교 부속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사회인으로 발을 닫기 전 이뤄낸 이 작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대응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너무 바빠서 그랬다고 믿었지만, 아마도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추후의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대한민국 사회는 남녀 불평등과 편견이 너무 심하다고 날이 바짝 서있는 30대의 필자가 퍼뜩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도 힘겨울 수 있구나’ 하는 일종의 각성을 하게 된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곁에 있는 남편을 통해서였다.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항상 씩씩하고 결단도 빠르고, 소위 ‘남성다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쉽사리 해결될 문제를 기어이 먼 길을 돌고 돌아 힘겹게 마무리하는 것을 보며 그 무게가 참 무겁구나 싶었다. 가장으로 항상 정답을 가지고 가족을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느껴졌다.

이후 수십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사회는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고, 남성이 눈물을 흘려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라 많은 변화와 발전이 된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아직 여성에게는 유리 천정이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여건이 덜 불리하다 할 수 있는 전문직인 의료계 내에서조차도 여전히 여성은 승진에서 뒤처지고, 리더 그룹에서 소외되고, 아직도 학교와 의료기관 내에서의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남녀 간 단순 평등이 아닌 형평성을 위해 오랜 기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

최근 3∼4년 간 우리 사회 여성의 목소리가 커진 것 또한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일 터인데, 젊은 남성과 여성이 언제부터 인가 서로를 적대 그룹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또 놀라운 일이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겪는 문제점은 당연히 발생할 수 있으나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커진 여성의 목소리에 오히려 역차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의기소침해진 남성들을 기성 세대와 정치 세력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성평등 정책은 형평성을 제공하는 전제로 사회조직적으로 아직은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입이라는 명목으로 갈등을 부추기고 극단적으로 둘로 나눠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지는 말자. 제대로 방향을 정확히 잡고 어느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합의점을 찾아 갈 수 있게 해결해 주길 바란다. 진정한 성평등이 지향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 모두 여성다움 혹은 남성다움이라는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자기다움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백현욱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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