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왜 이런 선택밖에 못하는가' 싶을 때, 와 닿은 '문장' [시를 읽는 아침]

주영헌 입력 2022. 5. 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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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로의 진영에 대한 불신과 혐오, 비난과 흑색 소문이 난무하는 선거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왜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는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울렸습니다, 그래서 류시화 시인이 쓴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라는 문장이 제 가슴에 와닿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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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시 '나는 투표했다'

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와 산문은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에 동시에 소개됩니다. <편집자말>

[주영헌 기자]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의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내 가슴이 색을 잃었을 때
물감 빌려주는 엉겅퀴에게 나는 투표했다
새벽을 훔쳐 멀리 달아났던 스무 살에게,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게 투표했다
행복과 고통이 양쪽 면에 새겨져 있지만
고통 쪽은 다 닳아 버린 동전에게 투표했다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에게 투표했다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2022년, 18~20쪽

2022년 3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 6월 또 한 번의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투표할 것이고, 그 결과 누군가는 당선되고 다수의 누군가는 낙선이라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지난 선거, 확신에 찬 투표를 한 사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어 어떤 선택을 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서로의 진영에 대한 불신과 혐오, 비난과 흑색 소문이 난무하는 선거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왜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는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울렸습니다, 그래서 류시화 시인이 쓴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라는 문장이 제 가슴에 와닿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만장일치의 투표는 있을 수 없겠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화자가 말하는 투표일 것입니다. 첫 민들레에게,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성별과 진영, 나이와 세대, 인종을 떠나서 만장일치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투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당당히 권리를 행사하는 투표가 될 것입니다.

솔직히 완벽히 만족하고 투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투표를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개중에서 덜 나쁜 사람을 뽑는 행위'라고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솔직히 저도 자괴감이 듭니다. '내가 하는 투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좌절감이 머리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투표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투표 포기도 하나의 정치 행위다'라고 위안하면서요.

그러한 생각으로 투표를 포기했다면, 당신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완전히 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을 움직이는 것은 유권자의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투표 포기가 일상적이라면, 정치인들은 유권자를 바라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대로만 움직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예를 일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투표가 어렵다면, '말 못하는 것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투표'하세요
 
 류시화 시인의 시집
ⓒ 수오서재
 
투표 포기는 우리가 그들을 '나쁜 놈에서 더 나쁜 놈들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투표는 꼭 필요합니다. 유권자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유권자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지 작은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

혹시 누구에게 투표할까를 고민하고 계신다면, 이런 사람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민들레를, 재잘대는 시냇물을, 밤새를, 얼음새꽃과 백일홍같이 자신이 아프다고 말 못 하는 것들을 지키겠다고 단 한마디라고 하시는 분들을. 그는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아픔을 전가하지 않고, 그 아픔을 같이 느끼려 노력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안심하고 우리의 등을 몇 년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류시화 시인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0년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시집으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엮은 시집으로 『마음챙김의 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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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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