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제도의 불시착
외출할 때 텀블러를 챙긴 지 꽤 됐다. 여전히 현관 앞에서 ‘아차’ 하며 텀블러를 찾으러 들어가기도 하지만 가방 한구석의 텀블러가 ‘불편’으로 느껴지지 않는 수준까지는 왔다.
매일 함께하다 보니 손이 가는 녀석도 정해져 있다. 디자인보다는 무게가 중요하다. 텀블러가 짐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어느 가방에 넣어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도록 얇은 원통형 제품을 선호한다. 하루를 마치고 귀가할 때에는 텀블러에 남은 음료를 꼭 비우고 출발한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한 습관이다. 가방끈이 어깨를 짓누를수록 ‘귀찮은 물건 1순위’는 텀블러가 될 것이 뻔했다.
이 사사로운 수고가 늘 빛을 보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과 카페를 찾으면 텀블러를 꺼내 들 타이밍부터 맞추기가 쉽지 않다. 홀로 텀블러를 요청하기 민망해 진즉 포기한 적도 많다. ‘점심 후 커피’에 목마른 이들로 북적이는 카페에선 가뜩이나 바쁜 직원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든다. 물론 텀블러를 잊고 집을 나선 날도 있다. 누군가 일회용컵에 담긴 음료를 먼저 구입해 건네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일회용컵에 담긴 음료를 권하는 일도 다반사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내심 기다렸던 건 그런 이유였다. 뜻밖에 일회용컵을 만나더라도 가책을 덜어낼 수 있다는 기대, 때로는 텀블러 없이 단출한 가방으로 외출해도 되겠다는 생각들이 앞섰다. 그것은 플라스틱을 한 번 쓰고 버리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편리’였다. 일회용컵을 들고 쓰레기통부터 찾는 대신 “반납하러 가자”는 대화가 오가는 풍경이 쉬이 상상되지는 않았으나 차차 익숙해지리라 여겼다. 내 손을 떠나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던 일회용컵의 마지막을 책임지는 일.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 건 이달 초였다. 시행을 한 달 정도 앞둔 보증금제 관련 기사에 프랜차이즈 카페 가맹점주로 추정되는 이들의 항의 댓글이 급격히 늘어났다. 개인 메일에도 같은 내용의 메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단적인 움직임이었다.
가맹점주들은 선구매해야 하는 컵 바코드 스티커 비용, 컵을 씻고 보관하는 업무 등이 과중하다고 호소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갑자기 터져나왔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아니, 대비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보증금제를 위해 2020년 6월 법이 개정됐으니 제도를 준비하는 2년간 비슷한 문제 제기가 숱하게 반복됐을 터였다.
그런데 가맹점주들은 프랜차이즈 본사에서도, 환경부에서도 그동안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여당의 ‘시행 유예’ 압박이 예고된 일처럼 뒤따랐다. 지난 4월 카페·식당 내 일회용품 규제 재시행을 앞두고 벌어진 상황과 판박이였다. 정치권이 개입하자 불과 이틀 뒤, 환경부는 보증금제를 12월로 유예했다. 시행을 3주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소통만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환경부는 프랜차이즈 본사와 수백 회 간담회를 갖고 제도를 설계해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105개 브랜드 중 보증금제와 연동된 포스(판매정보관리시스템) 개발을 마친 브랜드는 지난 14일 기준 3곳 정도에 불과했다. 보증금제 적용 일회용컵은 인쇄를 최소화하고 폐기물 부담금을 물리지 않아 제조 단가가 낮아지는 측면이 있지만, 본사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환경부는 바코드 스티커 비용이 문제되자 지난 18일에서야 이를 본사만 구매하도록 지침을 만들었다. 컵 무인회수기는 올해 50대 시범 설치한다는 계획이지만 아직 기기를 개발 중이라 예산·관리·운영 등 모든 단계가 불확실하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는 2002년 자발적 협약 형태로 도입됐다가 2008년 폐지된 과거가 있다. 이를 법률로 되살리기까지 12년이 걸렸다. 2017년 설문조사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찬성·수용한다는 답변은 89.9%에 달했다. 김미화 자원순환연대 이사장은 “분노를 지나 슬프다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일회용컵 보증금제는 정부가 아닌 시민들이 만들어낸 정책이었다.
환경을 위한다는 개인의 실천은 생각보다 자주,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이 이상과 실천의 간극을 메우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 아닌가. 나는 오늘도 텀블러를 챙기고, 다시 12월을 기다린다.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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