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구호 사역의 영리한 지속성
만국기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운동회나 축제 현장이 만국기와 함께 오버랩되기도 한다. 최근 폴란드에서 온 사진들에도 만국기가 있었다. 실외에는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실내엔 국기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만국기가 주는 감정의 들뜸을 일소시킨 건 사진에 덧붙인 코멘트 때문이다. “태극기가 안 보인다”고 했다. 잠시 잊었던 장소가 상기됐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폴란드 국경의 난민캠프였다. 사진을 보낸 사람은 우크라이나 난민 구호를 위해 폴란드로 의료선교를 떠난 의사였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폴란드는 난민캠프를 조직화해 운영했다. 전시장 부스처럼 국가별 공간을 구축해 제공했다. 자원봉사자나 의료진,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 부스에서 구호 사업을 했고 부스 입구엔 국기를 걸었다. 몇몇 국가들이 하나의 부스를 공유하는지 여러 국기가 함께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 루마니아는 물론 미국 캐나다 일본처럼 웬만하면 알아볼 수 있는 국가의 국기가 보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국기도 있었다. 그러나 의사의 말대로 사진 속 어디에도 태극기는 없었다.
의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전 세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현장에서 태극기를 볼 수 없는 건 아쉽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국제구호 단체인 월드비전이나 컴패션은 6·25전쟁 당시 부모와 남편을 잃은 고아와 여성 등 약자를 돌봤고 재건에도 힘을 보탰다. 그리고 그걸 밑거름 삼아 발전한 한국을 자랑스러워했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라는 상징적 의미도 부여했다.
물론 그 의사가 태극기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을 토로한 건 아니다. 한국 봉사자가 없어서도 아니다. 지난 3월 루마니아 국경에 취재하러 갔을 때도 우크라이나 아픔과 함께하는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여권법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나온 선교사들은 국경과 맞닿은 국가에서 그 나라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 물품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교회와 선교·구호단체들은 현장을 찾았고 한국에선 모금 활동에 나섰다.
의사가 지적한 부분은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구호 시스템 부재였다. 폴란드에서 사역 중인 선교사는 이를 ‘영리한 지속성’ 결여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 간 구호단체들은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길어야 2주 있다가 떠났다. 사진을 보여준 의사도 1주일간 폴란드에서 구호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놀랍게도 폴란드 난민캠프 부스에 국기를 걸고 있던 다른 나라 봉사자나 단체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일정을 마치고 떠났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 부스엔 같은 국적의 다른 단체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한국에는 없는 구호 시스템, 바로 영리한 지속성이었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근무했던 한 공무원 말이 떠올랐다. 그는 OECD에서 일하면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베스트 프렌드’가 없다는 걸 절감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도 6·25전쟁 때 도움을 준 나라를 친구의 나라, 형제의 나라라 부른다. 폴란드 국경에서 태극기가 날렸다면 어땠을까. 친구를 만들기 위해 도움 주는 걸 대놓고 알리자는 거냐는 비판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국기는 단순히 국기를 넘어 ‘함께한다’는 위로의 메시지가 되지 않았을까.
최근 우크라이나지원공동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연합한 단체가 영리한 지속성을 갖춘 구호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지난 23일엔 150t의 구호 물품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발대식도 가졌다. 이 단체 위원장인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장로이고, 사무총장은 목사이며, 선교단체들이 함께하고 있는데 기독교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말씀을 한국 사회에 전하며 함께 실천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구호 사역의 영리한 지속성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서윤경 종교부 차장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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