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봄 고양이' 도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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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언제 오는지 모르게 살금살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을 초록색으로 한껏 물들여놓는다.
겨울에 입던 옷을 슬슬 정리해야겠다고 망설이던 사이, 문득 바람에서 따뜻한 풀 내음이 느껴질 때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봄 고양이'가 생각난다.
헌책방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지만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책이 슬쩍 나타난다고 해 사람들은 책 제목을 '봄 고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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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언제 오는지 모르게 살금살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을 초록색으로 한껏 물들여놓는다. 겨울에 입던 옷을 슬슬 정리해야겠다고 망설이던 사이, 문득 바람에서 따뜻한 풀 내음이 느껴질 때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봄 고양이’가 생각난다.
봄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라 책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하다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구 출신 시인 고월 이장희의 시집이 봄 고양이다. 고월은 살아 있을 때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나 대구문인협회에서 시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6년에 ‘봄은 고양이로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출판 부수가 적어서 일찍 절판됐지만 입소문으로 고월의 시가 알려지면서 이 책을 찾는 독자가 많아졌다. 헌책방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지만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책이 슬쩍 나타난다고 해 사람들은 책 제목을 ‘봄 고양이’라고 부른다.
우리 헌책방에서 이 책을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다. 아직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기에 봄 고양이 초판은 정가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이 매겨진 귀한 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책이 사라졌다. 누군가 훔쳐 간 것이다. 대부분 범죄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했던가? 작은 책방이라면 더욱 그렇다. 책 도둑은 이 책방의 사정을 잘 아는 단골 중 한 명일 가능성이 크다.
책이 없어진 날 책방에 다녀간 손님 중 단골은 셋이었다. 혹시라도 이 셋 중에 책 도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매정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셋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무 설명도 없이 그저 “내일 책방에 들러주세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라고만 썼다. 셋 중에 A는 내일은 따로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만나자고 답신이 왔다. B는 내일 오겠다고 했다. C는 밤이 늦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봄 고양이를 데려간 사람은 이들 중 누구일까?
연락이 없던 C가 뜻밖에도 다음 날 책방에 나타났다. 몹시 소심한 성격인 그는 작은 목소리로 “봄이 되니까 길에 고양이가 많이 보이네요”라면서 말을 꺼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봄 고양이를 데려갔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C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는 봄에 가끔 가출하는데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면 다시 돌아오는 일이 많다더군요” 하면서 웃었다. 그 뒤로 우리는 별말 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그는 늘 그랬듯 책을 둘러봤고 나는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구석에서 새로 들어온 책 꾸러미를 정리했다.
C가 돌아가고 난 다음 봄 고양이는 원래 있던 자리에 와 있었다. 사라졌던 일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로 무심히 거기 있었다. 너야말로 정말 봄 고양이로구나. 며칠 후 C는 다시 책방에 와서 봄 고양이를 데려갔다. 이번엔 돈을 냈다. 적지 않은 금액이어서 그랬을까. 그는 전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빳빳한 신권 지폐를 하얀색 봉투에 넣어 말없이 내게 내밀었다. 봄 고양이는 이렇게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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