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은 결과일 뿐 실체가 아니다..불교의 '공'과 맞닿은 양자역학[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헬골란트>
카를로 로벨리
1925년, 23세의 젊은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휴가를 얻어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트에 들어간다. 이 섬에는 나무가 거의 없어 꽃가루가 날리지 않았다. 알레르기로 고생하던 하이젠베르크에게는 천혜의 환경이었다. 산책을 나가거나 괴테의 <서동시집>을 암기하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 쏟았다. 밤잠을 설쳐가며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의 난제들과 씨름했다. 마침내 훗날 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는 행렬역학의 단초가 드러났을 때 하이젠베르크는 모든 의심을 떨칠 수 있었다. 그는 “사물의 표면을 뚫고 기묘하게 아름다운 그 내부를 보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큰 깨달음이 연상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양자역학이 그리는 세계는 “기묘함”의 수준을 넘어선다. 도리어 아찔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초미시세계에서 물질은 -그런 것이 있다면-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가 다른 지점에 다시 홀연히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동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동이다. 그래서 이동 경로를 기술할 수 없다. 아니, 경로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 게다가 두더지 게임에서처럼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다. 우리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자연이 주사위를 굴리기 때문이다. 하나의 광자가 동시에 두 구멍을 통과하고, 심지어 관찰자가 있을 때는 한 구멍만을 통과한다는 허무맹랑한 실험 결과도 있다. 우리의 기본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들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은 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헬골란트>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관계론적 해석을 통해 양자역학을 기묘하고 아찔한 초미시세계에서 우리의 일상의 세계로 끌어올린다. 로벨리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물질이 속성을 갖는 독립된 실체라는 통념을 무너뜨렸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세계의 한 영역과 다른 영역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의 연쇄가 물질이라는 환상으로 귀결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상이 물질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 속에서 세상을 물질들로 분리해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질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그래서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물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해석에는 분명히 철학적 측면이 있다. 로벨리는 양자역학에 중력 이론을 접목해 루프 양자 중력이론을 만들어낸 일급의 이론 물리학자이지만 하이젠베르크가 그랬던 것처럼 철학에도 조예가 깊다. 관계론적 해석을 창안하면서 그는 기존의 철학 논의, 특히 관계의 철학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물질이라는 토대를 허문 그가 불교에 관심을 돌리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동양문화권의 우리는 모든 존재가 공(空)하다는 불교의 기본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지만 로벨리에게 이러한 생각은 양자역학만큼이나 충격적인 성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는 특히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용수의 <중론>을 상세히 소개한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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