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참을 수 없는 닭뼈통의 가벼움
며칠 전 후배들과 치맥을 하러 치킨집에 갔다. 주문한 음식이 아직 나오지 않은 테이블엔 차림표와 앞접시, 집게와 포크, 그리고 원통 모양의 금속제 통이 세팅돼 있었다.
바로 요놈이다. 60대 자영업자 W씨를 ‘감방’으로 이끈 물건. 지름 13㎝에 높이도 비슷하고, 무게는 잘해야 200g 남짓한 닭뼈 담는 통이다. 신발보다 가벼운 빈 통을 들어 머리에 부딪혀 봤다. 별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뼈가 들었다 해도 이걸 던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어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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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에 닭뼈통 던진 시민 구속
검·경, 더 중한 범죄자 풀어준 적도
검수완박 비판에 국민은 있나?
」
지난 20일 밤 인천시 계양구의 한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던 W씨는 유세를 하며 지나가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향해 이 통을 던졌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1층 테라스에서 날아온 통(또는 내용물 일부)이 이 후보에게 닿은 것 같았다. 물론 후보는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경찰은 현장에서 그를 체포했다. 그는 경찰에서 특정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단지 시끄러워 던졌다고 진술했다.
그래도 경찰은 다음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검찰은 그대로 법원에 보냈고, 인천지법 당직 판사는 휴일인 22일 실질심사 후 영장을 내줬다. “도주 우려가 있다”는 것이 발부 사유였다. 이 후보 측은 ‘선처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해는 마시라. 장황하게 당시 상황을 전하는 것은 술김에 선거 유세를 방해한 사람을 두둔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사건을 엮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게 구속까지 할 사안인가’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에 따져보는 것이다.
이보다 훨씬 중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검·경의 대응은 달랐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경찰서에 “딸이 감금된 것 같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른바 송파 여자친구 가족 살인사건의 시작이다. 경찰은 하루 만에 피의자 이석준(26)과 여자친구 A씨를 찾아냈다. A씨로부터 “감금돼 성폭행을 당했다”는 진술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진술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풀어줬다. 이석준은 며칠 뒤 A씨 집을 찾아가 어머니와 남동생을 흉기로 찔러 어머니가 결국 숨졌다.
올 2월에는 서울 구로구에서 스토킹 피해를 호소해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사건 발생 전 스토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피의자를 붙잡아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이번엔 검찰이 반려했다. 풀려난 범인은 석방 이틀 만에 피해자를 찾아가 살해했다.
이처럼 명백한 위험과 피해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이 미적대다 큰 피해를 자초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경찰과 검찰이 이번에는 이틀 만에 구속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은 앞선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뼈저린 반성의 결과일까?
인천 계양경찰서 관계자는 “선거 방해는 중하게 보고, 후보자나 유세원을 폭행하면 구속영장을 많이 신청하고 발부도 잘된다”고 설명했다. 단순 폭행이 아니라 선거를 방해한 점이 중요한 판단 요소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대선 기간 경북 성주를 방문한 이재명 후보에게 계란을 던진 청년이 이튿날 석방된 것을 보면 후보에게 뭘 던졌다고 다 구속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의 처리 과정 전반에서 경찰과 검찰·법원이 사정을 따지고 경중을 가리려고 노력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최근 전국의 각 지방검찰청은 홍보자료를 내기 바쁘다. 경찰이 엉터리 수사를 했는데 검찰이 보완수사를 통해 배후까지 깡그리 잡아냈다는 내용이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이 되면 이런 일 못 한다는 우회 홍보전일 터다. 계곡 살인 사건 주범 이은해·조현수를 구속한 인천지검도 숟가락을 얹었다. “검수완박 상태였다면 이은해는 무죄를 받았거나 무혐의 처분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인천지검이 이번에 처리한 ‘닭뼈통’ 사건을 보면서 평범한 시민들이 당하는 억울함을 검찰이 세심하게 바로잡을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보다는 주목받을 수 있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만한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조직적 반발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드러내놓고 표현은 못하지만 수사권을 넘겨받게 돼 한껏 고무된 경찰의 속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2002년 11월 ‘우리쌀 지키기 전국 농민대회’에서 연설을 하던 중 한 농민이 던진 달걀을 턱에 맞았다. 그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나”라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검찰과 경찰이 정치인처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판단의 기준이 닭 뼈 통 만큼 가볍지는 않았으면 한다.
최현철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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