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풍성했던가.. 2600쪽에 담아낸 한국 대중음악사
신현준 최지선 김학선 지음
을유문화사
2005년 출간된 ‘한국 팝의 고고학’은 한국 대중음악의 초기 역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 꼽힌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나눠 두 권으로 구성했다. 대중음악이 진지한 연구 주제로 취급되지 않는 경향에 맞서 자료와 이론으로 대중음악을 서술한 선구적 작업이다. 음원과 기사, 사진, 인터뷰 등 방대한 자료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전개를 조망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기존의 안이하고 부정확한 평가나 해석을 비판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신뢰할만한 역사를 구성하고자 했다.
절판됐던 이 책이 17년 만에 네 권으로 다시 나왔다. 80년대와 90년대 편을 각각 한 권씩 새로 작성했고, 기존에 발표된 60년대와 70년대 편은 개정·증보했다. 이로써 20세기 후반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충실하게 정리한 정본 하나를 갖게 됐다. 네 권을 합해 2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저자는 신현준 최지선 김학선, 세 명의 대중음악 평론가다. 신현준과 최지선은 60년대 편부터 같이 썼고 김학선은 90년대 편에 참여했다. 60년대와 70년대 편 공동 저자였던 이용우는 이번 개정 작업에서 빠졌다.
‘한국 팝의 고고학’이란 제목은 이 책의 야심을 보여준다. 가요나 대중음악 대신 ‘한국 팝’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한국 팝은 영미 대중음악이 아니라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지칭한다. ‘고고학’은 이들의 작업이 비평이나 가십이 아님을 강조한다. 대표 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후속편을 쓰는 데 17년이나 걸릴 줄 몰랐다면서 “음원, 기사, 사진 등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고 기억과 감상에 기초하여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아젠다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첫 권인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탄생과 혁명’(488쪽·2만8000원)은 한국 팝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한반도에 팝 음악은 언제 유입됐을까. ‘1945년 8월 미군의 진주와 더불어’가 세간의 통념이다. 그러나 팝 음악을 젊은 세대 취향의 서양 대중음악이라고 좁게 정의한다면, 시점은 더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 그럴 경우 ‘1960년대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책은 한국 팝의 시작을 60년대로 보며 그 시초로 작곡가 손석우를 지명한다. 손석우가 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1961년)에 대해 “‘현대적’인 ‘국산’ 대중음악, 당시의 비열한 어법을 빌리면 ‘왜색’이 없는 가요가 탄생한 것”이라며 “이 시점 이후로 ‘한국 팝’이라는 장르가 존재한다면 그 장르의 효시이자 전형을 확립한 작품이 손석우의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고 썼다.
60년대에 진입하며 싹을 틔운 한국의 팝 음악은 60년대 말 펄 시스터스와 신중현 등으로 대표되는 ‘팝 혁명’을 거쳐 70년대에 만개한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절정과 분화’(596쪽·3만원)는 포크로부터 시작해 대마초 파동, 대학가요제, 그룹사운드, 산울림 등을 조명하고 김민기와 조동진의 언더그라운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70년대는 무엇보다 포크의 시대였다. 왜 하필 포크였을까. 책은 70년대 초반의 퇴폐 풍조 단속, 10월 유신, 가요 정화 운동 등이 포크가 급부상하고 주류화된 배경이었다고 본다. 트로트가 불건전하다고 낙인이 찍히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유신시대의 수혜를 받은 포크가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봉쇄당하고 70년대 말에 저항음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흥미롭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80: 욕망의 장소’(768쪽·3만2000원)는 조용필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를 ‘여의도의 왕’으로 묘사한다. 방송국들이 밀집한 여의도는 TV 쇼 시대의 장소였고, 조용필은 TV 시대가 낳은 슈퍼스타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TV 쇼의 공간이었다면 영동은 트로트의 공간이었다. 나훈아 주현미 나미 윤수일 등이 주인공이었다. 신촌은 블루스의 공간이었다. 김현식 한영애 엄인호가 있었다. 김광석 정태춘 김창기 등은 대학로에서 민중의 노래를 고민했다. 강동에는 헤비메탈이 있었고 방배동에선 발라드가 태어났다. 이태원은 댄스였다.
X세대가 부상한 90년대를 다룬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상상과 우상’(756쪽·3만2000원)은 압구정동에서 시작해 홍대에서 끝난다. 압구정동에서 한국적 ‘쿨’(cool)이 탄생하고 홍대 클럽에서 한국 힙합과 조선 펑크가 형성된다. 책은 90년대 말 한국 팝이 도달한 지점을 이렇게 묘사한다.
“1990년대 말 한국 대중음악은 ‘완벽한 팝’, 조금 길게 말하면 ‘완벽하게 상업적으로 기획된 인공적 팝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를 상찬하든 저주하든, 이런 ‘완벽한 팝’을 모든 나라가 성취하지는 못했다는 팩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신현준은 시리즈에 대해 “인물론과 작품론에 치우친 기존 책들보다 장르론과 장소론을 내세우고 그걸 잘 엮은 책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수와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꼼꼼하게 펼쳐가면서도 포크, 발라드, 록 등 장르의 전개 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작곡자 작사자 제작자 연주자 등을 공들여 소개한다. 특히 이번에 새로 쓴 ‘1980’과 ‘1990’에서는 장소(지역)를 중심으로 장르와 가수들을 묶어보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이제는 지역명조차 희미해진 영동의 밤 문화를 기록하고 방배동을 발라드의 거점으로 조명한다. 정동 서대문 강동 등에 묻어있던 음악의 흔적과 역사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책은 꽤 두툼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특히 매 장 끝에 실린 전설들의 인터뷰를 읽는 재미가 대단하다. 이름난 가수 뿐만 아니라 당시 대중음악을 실제로 주도하던 이들의 육성을 들려준다. 조용필이 말하는 스타 등극 이전의 비사, 세상을 떠나기 직전 조동진의 육성, 넥스트 시절에 대한 신해철의 회고 등을 만날 수 있다. ‘조용필의 복심’으로 불린 80년대 대표 작사가 김순곤, ‘팝 칼럼니스트의 원형’ 서병후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까지 100명 가까운 이의 인터뷰가 수록됐다. 이 인터뷰만으로도 대중음악사가 정리된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 대중음악이 이렇게 풍성했던가 새삼 놀라게 된다. 대중음악은 당대의 사회와 문화, 이전의 역사, 아티스트의 재능, 제작자들의 창조성, 음악 산업과 미디어의 변화 등이 서로 작용하고 섞이며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들 모두를 함께 보고 그 관계를 꿰어낼 때 온전히 서술될 수 있다. ‘한국 팝의 고고학’은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미완성이다. 저자들이 말한 대로 50년대에 대한 별도의 서술이 필요하고, 2000년대 이후에 대한 서술 역시 남겨진 과제다. 지방의 대중음악 역사나 한국 음악의 국제 교섭사 등도 앞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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