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얼어붙은 IPO 시장.. '대어급' 잇단 철회에 하반기도 '먹구름'
뜨거운 열탕에서 순식간에 차디찬 냉탕으로 식어버렸다.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 시장 얘기다. 활기를 불어넣으리라 기대했던 ‘대어(大魚)’들이 줄줄이 상장 철회의 길을 택했다. 올해 들어 상장을 포기한 기업은 6곳이다. 이 중 3곳이 5월 들어 상장 철회를 결정했다. 지난 1월 현대엔지니어링을 시작으로 2월 대명에너지, 3월 보로노이가 증시 진입에 실패했다. 이어 5월 SK쉴더스, 원스토어, 태림페이퍼 등이 상장 절차에서 줄줄이 물러났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곳은 현대엔지니어링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대주주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IPO가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결국 올해 IPO를 포기했다. 증시 환경이 녹록지 않은 데다 자금이 딱히 부족한 상황도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유니콘 특례 1호’ 바이오 기업 보로노이의 상장 철회는 업계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니콘 특례상장은 시가총액이 5000억원 이상인 기업에 한해 외부 전문평가기관 한 곳에서만 기술성 평가를 받으면 상장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다. 기술력을 상당히 인정받은 기업만 노크해볼 수 있는 좁은 문이다. 보로노이는 수요예측에서 쓴잔을 마시고 상장 철회 카드를 꺼냈다.
LG에너지솔루션에 이어 최대 기대주로 부상했던 SK쉴더스 역시 후퇴했다. SK쉴더스는 2000년 설립된 ADT캡스가 SK그룹에 인수되며 탄생했다. ADT캡스는 물리적인 보안이 주사업이었으나 합병 이후 사이버 보안까지 강화됐다. 지난해 1조5000억원대 영업수익에 1219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업계 2위의 알짜 보안업체다. 5월 코스피 입성을 목표로 기업가치가 3조원 이상 평가받을 것으로 예견됐다. 그러나 시장은 SK쉴더스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결국 SK쉴더스는 “회사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려운 측면 등 제반 여건을 고려해 잔여 일정을 취소한다”며 상장 철회 신고서를 제출했다.
또 다른 SK그룹 계열사인 원스토어는 “원스토어의 향후 성장 가능성이 훨씬 크다”며 “어려운 시장 상황이라도 상장을 쭉 밀고 나갈 생각”이라며 강행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틀 만에 역시 글로벌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물러났다. 원스토어는 국내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실시했는데, 대다수의 기관이 공모가 범위 하단인 3만4300원에 미달한 금액을 써냈다. 공모가를 희망 범위 하단보다 20% 낮은 2만5000~2만8000원으로 확정해 일반투자자 대상 청약을 강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적정 가치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SK그룹 계열사의 잇단 상장 실패는 그룹 투자전문회사 SK스퀘어 주가도 끌어내렸다. 지난해 11월 인적분할 이후 8만5000원에 달했던 주가는 6개월 새 4만원대로 뚝 떨어졌다. SK스퀘어는 2025년까지 순자산가치를 현재의 3배인 75조원 규모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상장 철회로 상장 자금으로 사업을 확대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여기에 더해 내년 추진 예정인 11번가와 콘텐츠웨이브 등 다른 자회사들의 IPO에도 제동이 걸릴 듯 보인다.
11번가는 지난 2018년 프리IPO를 통해 국민연금과 사모펀드(PEF) 운용사 H&Q, MG새마을금고로부터 5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조건은 2022년 5월 31일까지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하고 2023년 9월 30일까지 코스피 시장에 상장하는 것. 이를 지키지 못하면 투자자에게 원금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한다. 11번가는 일단 ‘고(Go)’를 외쳤다. 5월 내 상장 전략과 기업가치 산정과 관련해 의견을 청취하는 프레젠테이션(PT)을 진행한다. 늦어도 6월 내로 상장 주관사 선정 작업을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실제 상장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진단한다.
▶잇단 상장 철회에 장외 시장도 꽁꽁
▷거래량 줄고 스타트업 투자도 찬바람
덩달아 장외 시장도 얼어붙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K-OTC 시장에서 거래된 비상장주식 누적 거래대금(5월 18일 기준)은 3380억원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반토막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거래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연초 이후 누적 거래량은 5600만주 수준. 지난해 같은 기간 거래량(9100만주)에 턱없이 못 미친다. K-OTC에서 거래 가능한 법인 수는 144개로 지난해 5월(132개)보다 늘어났지만, 실제 거래 규모는 지난해에 한참 못 미치는 셈이다.
시가총액도 줄었다. 올해 초 K-OTC 시가총액 규모는 30조원대였다. 2월 34조원으로 반짝 증가했다가 3월 31조원으로 다시 떨어졌다. 4월 25조원대로 크게 줄더니 5월 22조원대로 내려앉았다.
비상장 기업 투자 분위기도 냉랭하다. 최근 프롭테크(부동산에 IT를 접목한 서비스) 기업 집토스가 추가 투자 유치에 실패하며 일부 직원은 권고사직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연매출 30억원에 누적 투자유치금액이 90억원에 달한다. 한 프롭테크 관계자는 “집토스는 나름대로 수익을 내는 탄탄한 기업이었는데 이 기업마저 투자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업계에서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오 기업 사정은 더 처절하다(?). 지난해만 해도 임상 1상에 못 가더라도 2000억원 가치평가(밸류에이션)를 받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수익을 낼 모델이 없거나, 투자금 회수 기간이 긴 기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다. 투자사의 냉정한 판단이 이어지며 밸류에이션이 절반 수준으로 하락한 기업이 수두룩하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사업성이 좋거나 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쏠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중”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美 금리 인상·우크라 전쟁 악영향
▷상장 기업 몸값 거품 논란도 여전
IPO 시장이 얼어붙은 이유는 기업들이 밝힌 대로 글로벌 환경 악화에 따른 투자심리 악화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발 금리 인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중국의 코로나19 재확산과 봉쇄 조치 등 대외 악재가 증시를 휘감고 있어서다. 녹록지 않은 ‘매크로’ 변수가 공모주를 포함한 주식 투자 매력도를 크게 낮췄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된 공모가도 문제라는 목소리가 크다. 지난해 상장한 기업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 게 근거다. 조창민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역대 최대 규모였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IPO 시장은 다소 위축된 모습”이라며 “IPO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결국 상장한 기업 주가가 부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4월 20일까지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기업은 총 107개다. 이 가운데 코스피·코스닥 시장의 지수 대비 부진한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종목은 76개로 절반이 넘는다. 상장 초기 높은 수익률이 장기 수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게 조 애널리스트 설명이다.
최근 상장 기업 주가가 급격한 하락세인데도 불구하고, 신규 상장하려는 기업은 몸값을 양보하지 않고 있다. SK쉴더스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SK쉴더스는 상장사인 물리 보안 1위 기업 에스원보다 높은 기업가치를 산정해 논란이 됐다. 이후 비교 기업에서 미국 ADT, 알람닷컴, 퀄리스 등 해외 기업을 제외하며 평가 기업가치를 낮췄다. 주당 평가가액도 낮게 조정했지만, 할인율을 기존보다 적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공모 희망 가격은 변경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원스토어도 적자를 내고 있으면서도 애플, 알파벳(구글) 등 글로벌 기업을 비교 기업으로 산정해 논란이 일었다. 이후 네이버, 넥슨 등으로 비교 기업을 변경했지만 시장에서 받으려 하는 희망 가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매번 반복되는 고평가 논란은 분명 이유가 있다. IPO 기업과 기존 주주, 증권사의 이해관계와 맞물려서다. 자금을 조달하는 회사와 구주 매출을 진행하는 주주는 공모가가 높을수록 유리하다. 공모 규모에 비례해 인수 수수료를 받는 증권사 입장에서도 공모가가 높아야 이득이 커진다. 이 때문에 가능한 한 몸값을 높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증권가 얘기다. 한 IPO 관계자는 “경영진과 기존 주주들이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며 “상장 뒤 신규 주주에게도 수익을 줘야 하는데 기존 경영진의 욕심으로 상장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주식 시장 하락하니 백약무효
▷당장 주가 오를 반등 호재 없어
향후 IPO 시장도 밝지만은 않다. IPO 시장은 증시 장세와 관련 깊다. 코스피나 코스닥이 살아나지 못하면 IPO 시장도 활기를 되찾기 쉽지 않다. 거래량이 빠른 속도로 줄었다는 점은 투자심리가 얼어붙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5월 초 10거래일 간 코스피 시장 일평균 거래량은 9억4000만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6.4% 감소했다. 특히 시가총액 상위 10개 종목 일평균 거래량이 같은 기간 평균 39.8% 줄었다.
증권업계는 5월 코스피 밴드를 2500~2840선까지 전망했다. 한국투자증권 리서치센터는 5월 코스피 밴드를 2640~2840으로 제시, 다올투자증권은 2560~2780으로 전망했다. 키움증권은 2600~2800선으로 내다봤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코스피 밴드 하단이 어디일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더 떨어지더라도 회복이 가능한 구간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 역시 “그동안 진행된 코스피 포트폴리오 다양화와 여전히 기업 실적이 180조원대 유지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2018년 고점 이하로 낮아질 가능성은 미미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한국 증시가 빠르게 반등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반등에 필요한 재료가 없어서다. 윤석모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인플레이션,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중국 경기 부진과 셧다운, 추가 빅스텝 단행 등 우리 증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요인이 없다”며 “변동성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해석했다.
김영환 NH증권 애널리스트는 “악재가 심해진다기보다 반등 요인이 없다는 게 주식 시장의 고민거리”라고 진단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긴축 완화가 코스피 반등을 위한 핵심”이라며 “2~3개월에 걸쳐 미국의 뚜렷한 물가 하향 안정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상상인증권은 오는 6~7월 코스피 전망치를 기존 2600~2800에서 2550~2750으로 하향했다. 미국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이 주가가 오르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쏘카·마켓컬리 대기 중
▷연내 상장할지 저울질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상장을 계획 중인 기업들은 ‘눈치 보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모바일 플랫폼 최초로 상장을 준비 중인 쏘카는 지난 5월 6일 한국거래소 코스피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했다. 당초 계획은 1분기 실적을 결산하고 5월 중 증권신고서를 접수할 것으로 점쳐졌다. 그러나 IPO 대어들의 잇단 상장 철회로 이후 일정을 고심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쏘카의 기업가치를 2조~3조원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최근 장외가가 하락하며 1조7500억원대 시총으로 쪼그라들었다.
마켓컬리도 ‘이커머스 1호’ 상장을 노리며 하반기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한 뒤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컬리 몸값은 5조~6조원으로 추산된다. 마켓컬리는 테슬라 요건과 유니콘 특례상장을 통해 증시 데뷔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 요건 상장은 시가총액이 500억원 이상인 기업 중 직전 연도 매출이 30억원 이상이거나 2년간 평균 매출 증가율 20% 이상, 자기자본 대비 시가총액이 200% 이상 등의 조건에 부합하면 적자기업이라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수 있는 제도다. IPO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10만원대를 바라보던 마켓컬리도 최근 9만원 밑에서 거래된다.
쏘카와 마켓컬리 이외 현대오일뱅크, 교보생명, 카카오모빌리티, CJ올리브영 등도 당초 연내 상장을 목표로 준비 중이나 공모 절차를 일정대로 추진할지 내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올 하반기 넥스트칩, 에이치피에스피, 골프존커머스, 오에스피 등이 상장을 준비 중이다.
[명순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0호 (2022.05.25~2022.05.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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