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철학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난장판

김소연 2022. 5. 25.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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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탈국가화' '개인의 프라이버시 존중'
암호화폐 탄생의 심오한 철학 실종

“코인의 95%는 죽을 것입니다. 그걸 지켜보는 건 재미있겠죠.”

그는 지금 지켜보면서 재미있어 하고 있을까요?

이 말을 한 사람은 최근 열흘 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한국형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 발행자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입니다. 지난 5월 5일 ‘체스닷컴’과의 인터뷰에서 권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권 대표와 영국 경제 전문가 프랜시스 코폴라가 지난해 7월 벌인 설전도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코폴라가 당시 테라 운영 방식을 놓고 “테라가 사용하는 메커니즘은 당황한 투자자들이 출구를 향해 한 번에 몰려갈 때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자 권 대표는 “나는 트위터에서 가난한 사람과 토론하지 않는다”고 비꼬았습니다. 사실 트위터에서 권 대표는 유독 ‘poor’라는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당신 여전히 가난해?” 하는 식이었죠. 지난해 3월 테라를 예치하면 연 20%의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밝힌 후 “3억달러에 달하는 이자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냐”는 한 벤처캐피털리스트의 질문에는 “Your mom”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고요.

그런 권 대표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의 머스크’라고 불렀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뒤틀린 천재의 오만함’이라고 수군댔다죠.

권 대표가 ‘95%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한 지 일주일도 안 돼 ‘95%’에 테라와 루나가 포함됐습니다. 전체 코인 시총 4위였던 루나 가치가 단 며칠 사이에 쓰레기가 되고 상장폐지까지 된 것에 대해 전 세계 코인 투자자는 물론 일반인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태는 일파만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형국이 됐습니다. 루나와 테라 폭락으로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권도형 대표는 물론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이자 소셜커머스 티몬 설립자인 신현성 씨까지 함께 고소했죠. 한동훈 신임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단(합수단) 재출범이었는데, 루나 사태가 합수단 1호 사건이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뿐인가요. 루나와 테라가 전 세계 가상화폐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으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전 세계인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이로 인해 당분간 코인과 NFT 시장이 얼어붙을 수 있는 데다, 규제 목소리가 높아질 것도 자명한 사실이고요.

권 대표는 루나를 “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불렀습니다. 그 위대한 발명품인 루나가 핵폭탄이 돼 터져버린 이후에는 “내 발명이 여러분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재미있어 하지 않고, 가슴 아파하고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은 이겁니다. 화폐사에서 암호화폐의 탄생은 커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화폐의 탈국가화’와 ‘개인의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었죠. 그런데 그 철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난장판뿐이라는 현실.

[김소연 부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0호 (2022.05.25~2022.05.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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