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에 '숙원 과제 지지' 얻어낸 일본의 모순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김종성 기자]
▲ 기시다 일본 총리와 의장대 사열하는 바이든 미 대통령 (도쿄 AP=연합뉴스) 지난 23일 일본을 방문한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도쿄 아카사카 영빈관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
ⓒ 연합뉴스/AP |
23일 미일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일본의 숙원 과제를 언급했다. 인도·브라질·독일과 함께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미국 정부의 지지 입장을 표명해준 것이다.
이런 입장이 미국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30년 전에도 미국은 지지 입장을 밝혔다. 1992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2면 상단 기사는 "2일의 미일정상회담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수상은 일본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기본적 지지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일본 총리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를 언급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 최초의 사례 때 미국이 '오케이'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 표명은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최종적 성사 여하를 떠나 어떻게든 성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처럼 '기본적 지지'를 표시하고 대충 끝내기는 쉽지 않다.
조건부 지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이 현 국면을 활용해 중국·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자면 일본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협조를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성의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의 지지 표명이 나왔으므로 앞으로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일본을 돕게 될지 주목된다.
그런데 미국의 일본 지지에는 단서가 붙어 있다. 워싱턴 시각으로 23일 발행된 미국 언론 <더힐(The Hill)>에 실린 '바이든, 개혁된 유엔 안보리에 일본 진입을 지지... 일본 수상 밝혀(Biden backs Japan joining reformed UN security Council, Japanese PM says)'라는 기사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바이든 행정부는 유엔 안보리 개혁을 전제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
그간 논의돼 온 안보리 개혁 과제 중에는,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이 세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바꾸는 것이 포함돼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자국의 행보에 제동이 걸리곤 하는 현 상황에 변화를 주는 게 안보리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그런 제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두 나라를 안보리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테이블에서 중국·러시아의 의자를 없애는 것이 미국이 의도하는 안보리 개혁의 궁극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의 국명은 국제연합헌장 제23조 제1항에 명기돼 있다. 그래서 헌장을 바꾸지 않는 한, 헌장에 명기된 국가들을 안보리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제108조에 따르면, 헌장 개정에는 총회 회원국 3분의 2의 찬성과 5대 상임이사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중국·러시아가 협조하지 않는 한, 중국·러시아를 내보내는 것도 힘들고 일본을 새로 추가하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제23조 제1항에 빈틈이 있다. 이 조항은 "중화민국·프랑스·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영국 및 미합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다"라고 규정한다. 타이완해협(대만해협) 서쪽의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가 아닌 동쪽의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적혀 있고, 현재의 러시아가 아닌 과거의 소련이 표기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23조 제1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가 상임이사국 지위를 잃을 수도 있고 유지할 수도 있다. 또는 미국이 해석을 무기로 두 나라의 기세를 떨어트릴 수도 있다. 해석 여하에 따라 미국이 원하는 안보리 개혁이 여러 방향으로 이뤄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바이든이 '개혁된 안보리'를 조건으로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했으므로,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한다면 미국의 희망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제23조 제1항이 미국의 의도에 맞게 해석될 수 있도록 일본이 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바이든의 지지 표명은 일본에 대한 '미션 부여'인 측면도 없지 않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30년 전부터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해왔다. 그런 일본이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세계 정치의 역학 구도 때문이기 하다. 그러나 남북한과 중국이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일본의 전쟁범죄 때문인 측면도 다분하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세계 지도국가가 되려고 나서게 되면 이로 인한 윤리 문제도 당연히 동반될 수밖에 없다. 남북한과 중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일본의 전쟁범죄는 그런 면에서 일본의 족쇄가 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상임이사국 진출 움직임이 꿈틀대던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용감히 고발하고 이를 계기로 문제가 크게 확산된 것도 일본의 발목을 잡는 측면이 컸다.
그렇게 발목이 잡혀 있는데도 일본은 상임이사국의 꿈을 접지 않고 있다. 갈 길 바쁜 바이든을 움직여서라도 뜻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런 일본을 고무시킬 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국제연합 이전인 국제연맹 시절에 있었던 비슷한 케이스가 그것이다.
일본의 모순과 부조리
국제연맹에서는 이사회 상임이사국 숫자를 총회 회원국 과반수 찬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런 구조 하에서, 독일·폴란드·스페인·벨기에 등을 포함시켜 상임이사국을 4개국에서 15개국로 늘리는 방안이 1926년께 추진됐다. 이탈리아·프랑스·영국·일본 외에 11개국을 새로 추가하는 방안이 그때 모색됐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26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 '연맹 상임이사국'은 위의 후보 국가들을 열거한 뒤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될 것은 확실하나, 타(他)는 의문이더라"라고 전망했다. 이 보도대로 독일만 그해에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했다. 제1차 대전 패전 뒤의 헌법 제정 회의가 바이마르에서 열렸다 해서 바이마르공화국으로도 불렸던 당시 독일국의 부흥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실질적 최고 기관인 국제연합과 달리 국제연맹에서는 총회가 그런 위상을 보였다. 그래서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의 위상을 지금의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된다는 것은 세계 선도국가가 됐음을 공인받는 의미가 있었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가 불과 12년 만에 그런 공인을 받은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응원하는 사례로 활용돼선 안 된다. 일본은 세계평화를 표방하는 국제연맹을 파탄시킨 장본인이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에 요구되는 고도의 책임을 무시하고 연맹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인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1일자로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이에 맞서 국제연맹은 영국 백작 리튼(Lytton, 리턴)을 단장으로 하는 리튼 조사단을 파견해 사태 파악에 나섰다. 리튼 조사단이 내린 결론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으며 만주국은 자발적으로 세워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이 결론을 승인하고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촉구하는 한편 만주국 불승인 방침을 일본에 통고했다. 하지만, 상임이사국인 일본은 이 결정을 거부했다. 그해 3월 8일, 국제연맹 탈퇴를 결정했다.
그 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전범국가의 길을 걸었다. 이는 독일 및 이탈리아의 침공과 더불어 전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는 동시에 국제연맹을 파탄시키는 원인이 됐다. 상임이사국이 국제연맹 파탄에 앞장서는 셈이 됐던 것이다.
그랬던 일본이 국제연합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게다가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 같은 전쟁범죄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 지도국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일본이 얼마나 모순되고 부조리한 국가인지를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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