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전쟁기념관

2022. 5. 25.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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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국민대 교수·건축학부)


오랜만에 찾은 전쟁기념관은 사뭇 달랐다. 도심이지만 한적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입구부터 소란했다.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한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아 정돈이 덜 됐고 벌써 일인 시위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경찰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시위대 확성기 소리가 요란했다. 지난 12일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전면 개선을 위한 공청회가 개최됐다. 1994년 개관했으니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전시도 낡았고 주변 환경도 변해서 다가오는 30년을 준비하는 취지로 열렸다. 공청회 논의는 다양했지만 몇몇 숙제를 남겼다.

전쟁기념관 형태는 강력한 대칭 구조로 상징적이다. 본관도 그렇지만 좌우 회랑이 뻗어 나와 전체적으로 ‘디귿’자 형태를 완성하며 사찰의 엄숙한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주변 미군기지 반환으로 공원으로 조성돼 통합적인 계획이 필요한데 기념관의 강력하고 자기 완결적인 형태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공원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대통령 집무실이 길 하나 건너로 이전해 왔으니 고민은 늘어난다.

명칭도 문제다. 전쟁기념관은 ‘워 메모리얼(War Memorial)’을 직역한 것이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그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그래서 생기는 오해도 많다. 전쟁이라는 부정적 사건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이다. 아무리 숭고한 뜻의 전쟁이라도 개인에게는 비극이며 상처다. 호국추모관 등이 대안으로 나오고는 있지만 어느 것도 크게 공감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메모리얼의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 워싱턴DC에는 몇 개의 메모리얼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내셔널 몰의 서쪽 끝에 있는 링컨 메모리얼이다. 미국 노예해방 등의 업적을 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는 흰색 대리석 건물로 고대 신전을 모방해 지었다. 내부는 텅 비어 있고, 실물의 네 배가 넘는 링컨의 좌상이 놓여 있을 뿐이다. 별다른 기능은 없어 우리 사당 같은 느낌이지만, 기념관이라는 번역이 어색하지 않다.

성격이 다른 메모리얼도 있다.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이 대표적이다. 기념관이란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넓게 벌어진 V자 형태로 땅을 파내고 벽을 만든 것이 전부였다. 한쪽 벽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다른 쪽 벽을 따라 올라오게 되는데 검은 화강석 벽면에는 전사자 명단이 음각돼 있다. 벽(the Wall)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단순하다. 1982년 현상설계를 통해 선정한 작품인데 출품작이 1400여개였다고 하니 국가적 관심 사안이었음이 분명하다. 건축가는 중국계 여성으로 당시 건축대학원 졸업반 학생이었다.

논란은 지나치게 단순해 전쟁의 참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촉발됐다. 거기에 아시아계 여성 건축가라는 점도 거부감이 심해 의회 청문회가 열릴 정도였다. 당선 건축가인 마야 린은 전쟁의 정치가 개인에게 닥친 일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 사람들의 이름을 땅을 째고 꺼내서 반짝이는 돌에 새기는 것이 의도라고 설명했다. 월남전은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었고 벽에 새겨진 사망자 명단만 5만80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상처와 고통의 아픈 기억을 적절하게 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다. 가족의 이름을 탁본하며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문자 그대로 이름을 기억하는 새로운 형태의 추모다. 이 경우 적확한 번역은 ‘베트남 전쟁 전몰장병 추모벽’ 정도가 될 것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매년 200만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에는 단연 인기가 많은 방문지이기도 하다.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잊지 않겠다는 결의가 건립 당시의 건축 의도와 충실하게 결합된 공간이다. 하지만 군사박물관과 추모관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고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이 부정적인 어감을 포함하기도 해서 대통령 집무실 이웃 건물로는 부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사회문화적, 물리적 환경이 급하게 변하고 있으니 지혜를 모아 볼 일이다.

이경훈(국민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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