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최고' 음치가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문세경 기자]
"어디 가서 절대 노래 부르지 마."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른다. 그때 남편이 하는 소리다. 내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내가 들을 때는 음정이 틀린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들을 때는 원음과 많이 다른가 보다.
나는 듣기가 취약해도 음악은 좋아한다.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긴다. 짐작건대 청력이 안 좋아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음정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청력이 나빠졌다고 노래 부를 때 음정이 틀릴 거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다. 오만한 건지 둔한 건지 내 음정이 틀렸다는 것을 10여 년 전에야 알았다. 어느 날, 거짓말은 절대 못 하는 한 지인이 내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정이 하나도 안 맞아."
나는 그동안 내가 부르는 노래의 음정이 원음과 다르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원음과 다르게 부르는 내 노래를 듣고 사람들은 왜 손뼉을 크게 쳤을까. 왜 나에게 음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당시만 해도 나는 노래 부를 기회가 오면 "저는 음치예요(그래서 노래를 못 불러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키지 않아도 손을 번쩍 들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에 간다면 앞장서서 가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렇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차마 '네가 부르는 노래는 음정이 하나도 안 맞아 듣기 곤혹스러웠'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이 자리를 빌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준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 "입을 크게 벌리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세요. 틀려도 괜찮습니다"라고 말씀 하시는 멋진 송희태 선생님! |
ⓒ 문세경 |
"합창단을 꾸려야 해서 부득이하게 오디션을 보려고 합니다. 장르는 정하지 않습니다. 부르고 싶은 노래를 정하시고, 왜 그 노래를 선택했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신청할까? 말까?' 나는 5초 동안 망설였다. 5초 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신청서가 접수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사흘 후에 '오디션'에서 부를 곡명을 정하는 일만 남았다.
음치가 음치를 들키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무엇이 있을까. 머리를 굴렸지만 어떤 노래를 불러도 내 음은 맞지 않는다는 걸 또 잊어버렸다. 결국 부르기 쉬운 동요, '오빠 생각'을 부르기로 했다.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 낯선 사람이 많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각자가 정한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다들 잘 불렀다. 내 차례가 왔다. 떨리지는 않았지만 차마 노래를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 가서 노래 부르지 말라는 남편 말도 생각났다. 그냥 포기할까, 하는데 옆사람이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말했다. "어서 노래하시죠."
한 차례 구겨진 체면이 더 구겨지기 전에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오빠 생각'을 불렀다. 서울 가신 오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여동생의 슬픔을 담아 '오빠 생각'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박자와 음정이 맞느냐 안 맞느냐가 더 중요했다. "비이~단 구~우~두 사 가지고 오~오~신 다아~더니~~~" 혼신을 다해 마지막 구절을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합창을 이끌어갈 강사가 말했다.
"노래 못 부른다는 것은 엄살이었네요. 잘 부르셨어요.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강사의 피드백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따라오라"는 네 마디 말은 노래를 잘 불렀다는 말보다 몇 배는 더 반가운 소리였다.
|
▲ 우쿨렐레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주시는 김강수 선생님 |
ⓒ 문세경 |
|
▲ 5월 17일, 용산의 작은 도서관 '고래이야기'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는 참여자들 |
ⓒ 문세경 |
피로도는 점점 높아갔다. 자유를 통제받고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하루빨리 지옥 같은 나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4월 중순부터 서서히 확진자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면 해제한다는 발표를 했다. 드디어 통제의 시간이 끝났다. 나는 환호했다.
거리두기가 풀린 지 일주일 후, 마을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의 합창단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다. '고래이야기'라는 용산구 효창동의 마을 도서관에서 모인다는 알림이 왔다. 첫 모임 날, 기획자는 말했다.
"이 '함께 노래하는 마을만들기' 프로그램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에요.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함께 모여서 오아시스 같은 시간을 만드는 거예요."
실내 마스크는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마스크 속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을 것이다. 오디션을 위해 노래 부를 때 잠시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상기되었고 환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의 대면 모임이어서인지 생동감이 넘쳤다.
"제가 정신적으로 좀 힘들어요. 마땅한 취미 활동을 찾다가 페이스북에서 공고를 보고 신청했어요. 합창을 하면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참여하게 됐어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청년은 참여 동기를 위와 같이 말했다.
"저는 용산구 주민이에요. 용산연극협회에서 일 하고 있어요. 그동안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을 못 만나서 답답했어요. 용산과 관련된 연극을 만들고 싶어요. 주민들과 친해지고 싶고, 용산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참여하게 됐어요."
저마다의 참여 이유가 각별했다. 이쯤이면 나의 참여 동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우긴다.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다양한 연령대에서 모였다. 함께 노래 부르면서 마음을 열고, 마을의 역사를 알고, 악기도 배울 수 있으니 일타쌍피가 아니라, 일타N피다.
"삐삐삐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남편이 귀가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했어. 연습해서 공연도 한대. 공연하면 꽃다발 사갖고 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부산에서도... 한국인끼리 이러는 현실이 서글프다
- [단독] '25년 계양사람' 승용차, 새벽엔 목동에 낮엔 계양에
- 세계를 뒤흔든 책, 윤석열 대통령과 엘리트들 보십시오
- 프로야구 사상 가장 완벽한 유격수... 압도적 슈퍼스타 탄생
- '박지현 맞불 기자회견' 이준석 "'거물호소인' 이재명, 날려버려 달라"
- 법 시행 겨우 100일... '의미 없게 만들어달라'는 경총
- 신입사원 열에 일곱은 '중고'? 왠지 씁쓸한 이 상황
- [단독] "유은혜가 무마" 발언 최성해 전 총장 검찰 송치
- '86 용퇴' 박지현 사과문에, 송영길 "민주당 절박해서"
- 한동훈은 소통령? 인사검증 맡기려 입법예고 이틀로 단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