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파리, 애니메이션이 완벽 재현한 낭만적 시간
[김상목 기자]
▲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 영화 포스터 이미지 |
ⓒ ㈜다날엔터테인먼트 |
1_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어떤 도시는 국가를 초월하는 상징으로 각인되곤 한다. 뉴욕, 로마, 런던, 베를린, 도쿄, 베이징, 모스크바, 델리, 서울... 우리는 이 도시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단순히 현존하는 번잡한 풍경 너머 다른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마련이다. 그 도시가 가진 역사, 도시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과거 중세시절, 봉건영주의 압정에 신음하다 도망친 농노들이 자유도시에 도착하는 순간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느끼게 한다!'는 수식어는 우리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던 대목이다.
이렇듯 거대 도시는 인류 문명의 집약이자 해당 사회의 정점에 속하는 존재다. 도시에는 그저 수치나 규모로만 판단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수백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에는 그 개별의 삶만큼씩 '이야기'가 존재하기에 그 공간에 축적된 보물더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광산처럼 이야기에 목마른 이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원천이 되어준다. 당장 우리가 사는 도시를 한번 돌아보자. 지방 중소도시라 할지언정 이야기를 품지 않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사고와 드라마틱한 인생의 순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기억의 수명을 연장해나간다.
그 도시들 중에서도 '파리'라는 이름은 조금 더 특별하다. 프랑스의 수도를 넘어 유럽의 물질적/문화적 풍요를 집약시켜놓은 것만 같은 '아우라'를 찬란히 빛내는 도시. 경제나 군사력 못지않은 힘으로 작용하는 '소프트 파워' 측면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는 이 도시는 여전히 그 위세를 뽐내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중이다. 2차 세계대전 말 패전이 임박한 히틀러가 거듭 지시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 나치독일군마저 도저히 이 도시를 파괴할 수 없어 명령을 거부했더라는 전설 같은 일화의 주인공인 도시, 또한 우디 앨런의 옴니버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영화적으로 재현된 벨 에포크의 무대였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예술적 시도가 파리를 주인공으로 탄생했고 여기에 또 하나가 더 보태어진다. 애니메이션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가 바로 그 주역이다.
▲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 영화 스틸 이미지 |
ⓒ ㈜다날엔터테인먼트 |
2004년 드림웍스 제작 애니메이션 <샤크>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던 애니메이션 감독 비보 베르즈롱은 지난 몇 년간 미국에 이주해 살면서 내내 그리워하던 파리를 무대로 한 작품 작업에 들어간다.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전율에 빠지게 하기 직전의 (제국주의 수탈과 대함거포주의 군사적 긴장과 계급갈등 등등 머지않아 폭발하고야 말 불씨들은 일단 제쳐두면) 좋았던 옛 시절, 바로 그 '벨 에포크'의 시간을 재현하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1910년의 파리를 낭만적으로 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 결과는 실사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100여 년 전 이상화된 파리가 관객의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과도 같은 결과로 증명된다. 영화 시작과 함께 그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 효과에 힘입어 의도적으로 흑백의 필름질감을 입힌 화면에 극장 뉴스릴이 등장한다.
뉴스영상 속 파리는 센 강이 홍수로 범람해 수심이 무려 6미터 상승한 상태다. 당연히 도시 곳곳은 물에 잠긴 상황이라 시민들은 보트로 이동하거나 응급조치로 임시 가설된 부교로 통행하는 중이다. 심지어 에펠탑 밑단도 침수된 채다. 유일하게 마른 땅은 바로 몽마르트 언덕 뿐이다. '대한늬우스'를 연상케 하는 공익광고에 뒤이어 멜리에스를 떠올리게 하는 초창기의 환상영화들이 재해에 지친 파리시민들을 위로한다. 당시에 잦았던 영사사고가 발생하지만 영사기사의 임기응변으로 어찌어찌 수습된다.
그 극장 영사기사, '에밀'은 가게에서 새 카메라를 구해오는 길에 친구이자 괴짜 발명가인 '라울'을 만난다. 친구는 택배업 선구자를 자처하는 중이다. 라울에겐 해바라기씨 기름으로 굴러가는 당대의 슈퍼 튜닝 카 '캐서린'이 있다. 캐서린에 얻어 탄 에밀은 라울의 배달장소인 박사 연구실에 함께 들른다. 박사가 부재중인 틈을 탄 라울의 실험정신 덕분에 생물을 급속 성장시키는 시험 중이던 약물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에밀은 연구실에서 괴물을 목격한다.
그 괴물은 실은 약물의 효과로 2미터 넘게 거대화된 벼룩이었다. 벼룩의 도약력은 스파이더맨을 상상하면 딱 맞을 정도로 엄청나다. 게다가 실험약물의 부작용(?)으로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존재다. 이제 파리의 밤거리에는 괴물 목격담이 횡행하고 시장 출마를 노리던 경찰서장은 홍수로 흉흉한 민심을 달랠 겸 자신의 시장 출마 준비를 위해 괴물 퇴치에 나선다.
이때 파리의 인기 가수 루실은 달밤에 자기 앞에 나타난 괴물을 목격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집에 뛰어 들어가 현관문을 걸어 잠근다. 그런데 문틈으로 천상의 목소리 같은 가락이 들려온다. 바로 벼룩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읊조리던 곡조다. 그 노래를 듣고 그가 위험하지 않은 존재임을 루실은 알게 된다. 그녀에 의해 '프랑코'란 이름을 갖게 된 벼룩은 루실과 듀엣을 이뤄 그녀의 카바레 공연장에서 멋진 공연을 펼치지만 곧 위기가 찾아온다.
3_벨 에포크-쥘 베른-마이너리티의 앙상블
▲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 영화 스틸 이미지 |
ⓒ ㈜다날엔터테인먼트 |
정교한 당대 파리 풍경의 환상적 재현에 비해 이야기 구성은 비교적 전형적으로 평이하게 흘러간다. 다소 아쉽게 느낄 이들이 분명 나올 테다(필자 또한 그렇다). 하지만 이 공들인 애니메이션에는 두개의 특별한 돌출부가 자리를 떠억 하니 잡고 있다.
첫 번째.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대로 '벨 에포크' 시절을 편집광적으로 재연하는 시각적 이미지의 향연이다. 이건 영화를 목격해야만 확인 및 증명 가능한 과제다. 하지만 멜리에스, 카바레, 에펠탑, 몽마르트, 비행선, 초기 형태의 자전거와 자동차, 무엇보다 뒷골목을 포함한 도시 파리의 백여 년 전 풍경을 상상해 왔거나 단편적 기록으로만 접해왔던 이들에게 영화 러닝타임 90분은 타임머신에 올라탄 것처럼 황홀경을 선사해줄 시간이다. 그저 특수효과를 뽐내는 것에 그친다면 이런 상찬은 과한 감이 있다. 하지만 기꺼이 예찬하는 이유라면, 감독이 정말 파리란 도시에 애착을 갖고 헌사를 남기려는 진심이 절절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풍경들의 성찬은 현실에 존재했던 벨 에포크의 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쥘 베른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당대 유럽문명의 성취와 발전에 낙관적이던 쥘 베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해저 2만리> < 80일간의 세계일주 > <달세계 여행> 등의 역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 속 펼쳐진 세계는 (약간의 의외는 있을지언정) 계몽과 이성, 과학을 믿으며 시행착오는 있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결국 올바른 역사발전으로 향할 것이라는 낙관으로 가득하다.
그 낙천적 세계관이 이 영화 속에서 온전히 체현된다. 약자에 대한 (다분히 시혜적이지만 인류애가 깃든) 동정과 연민, 권선징악의 관철, 인류에게 닥쳐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될 기술문명의 도약이 영화 전체에 구현되고 있다. 판타지 설정요소로 당대 수준을 초월하는 장치들은 스팀펑크·디젤펑크적 이미지를 작품에 살짝 덧씌워낸다.
두 번째.
그저 환상동화를 넘어서는 영화의 매력이라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연민과 타자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일 테다. 영화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나 <킹콩> <모르그 가의 살인> 같은 '가스등 시대'의 괴담 풍 작품들에 헌사를 바치듯 많은 순간 선배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프랑코 캐릭터는 무엇보다 <오페라의 유령>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전 연령 관람 기준에 맞춰 순화된 표현과 수위를 선보이긴 하지만, 외모로 인해 졸지에 괴물 취급을 받으며 퇴치의 대상이 된 프랑코의 수난과, 그의 심정을 대신하는 애조 띤 서정 가득한 노래, 그 진심에 반응하는 당대의 인기가수, 거기에 아무 계산 없이 힘을 보태는 영사기사와 사고뭉치 발명가, 원숭이 조수까지 액션모험물의 수다스런 주인공 그룹 풍경이 제대로 구현된다.
반면에 적대하는 세력은 도시의 소박한 일상을 즐기지 않고 무시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거드름을 피우지만 배후에서는 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권력을 거머쥔 채 겉으론 깨끗하고 그럴싸한 허우대로 신사 행세를 하지만,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고 차별하며 전횡을 일삼는 악당들이다.
그 권력자들에 맞서는 선한 이들의 연대는 도시의 낡고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벼룩에게로 향한다. (의외로 이 구도를 발전시키면 현대의 사회파 스릴러 물로 그대로 연결될 수 있다) 딱 영화 속 주요 무대인 카바레에서 현대 샹송의 맹아가 싹을 틔우던 시절에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경향이 태동한 사실과도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쥘 베른의 소년만화 풍 세계관에서 딱 멈춰서긴 하지만.
▲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 영화 스틸 이미지 |
ⓒ ㈜다날엔터테인먼트 |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제한적 세계관은 흠결이라기 보단 오히려 총체적 구현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만큼 특히 프랑스인들에겐 실낙원 같은 시절인 벨 에포크의 순간이 만화적 상상력에 힘입어 더욱 이상화된 형태로 본 작품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와 대구를 이루는 (전체 분량에 비해 꽤나 긴) 엔딩 크레디트는 마치 그 시절 뤼미에르의 극장에서 상영되던 인기영화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여운을 남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벨 에포크의 한 조각이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작품정보> |
몬스터 싱어: 매직 인 파리 A Monster in Paris, Un monstre à Paris 2011|프랑스|애니메이션 2022.05.26. 개봉|90분|전체관람가 감독 비보 베르즈롱 주연 바네사 파라디(루실 역), 션 레논(프랑코 역), 애덤 골드버그(라울 역), 제이 해링턴(에밀 역), 대니 휴스턴(메이놋 역) 출연 마델린 지마(모드 역), 캐서린 오하라(카를로타 역), 메튜 겍지(알버트 역), 폴 밴디(내레이터 역) 제작 뤽 베송 수입 다일리컴퍼니 배급 ㈜다날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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