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 남장대 강화산성에서 가장 높은 산인 남산 정상에 세워진 남장대는 이곳을 지키는 장수의 지휘본부로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의 남장대는 최근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 운민
오랜만에 다시 강화읍으로 돌아왔다. 고려궁지, 성공회 성당, 용흥궁 등 갈 곳도 즐길 곳도 많은 강화 도심이지만 아직 다룰 곳도 소개할 장소도 많다. 서울 북악산, 인왕산, 남산을 두르고 있는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강화산성이 고을의 사방을 지키고 있었다. 읍내에서 가장 우뚝 서있는 산인 남산(222m)의 능선을 가로질러 남문으로 내려와 다시 견자산(60m)을 거쳐 북산(140m)을 통해 서문으로 내려온다. 18km의 길이를 자랑하는 한양도성에 비해 강화산성의 둘레는 약 7km로 짧다면 짧은 거리지만 역사적 의미로는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성벽의 안과 밖에 걸쳐 유의미한 장소가 두루 걸쳐있다.
강화산성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동네 뒷산으로 산책을 하는 코스로 사랑받고 있고, 해마다 봄철이면 북문 일대가 벚꽃으로 뒤덮여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 강화읍의 사방에 울타리처럼 두른 성벽인 만큼 어디서든 접근이 수월하다. 동선과 시간을 고려해 강화읍의 외각에 위치한 서문에서 산성 트레킹의 서막을 열기로 하자. 서문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남산의 산자락을 따라 이무기처럼 성벽이 아찔하게 이어져있다. 하지만 산을 오르기 전 서문 앞 공터에 연무당 옛터라 세겨진 비석을 눈여겨봐야 한다. 건물의 초석도 남지 않은 이곳에서 한국사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서문에 자리한 연무당터 강화산성 서문에 자리한 연무당터는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근대사의 비극을 담고 있는 장소다.
ⓒ 운민
연무당은 원래 강화 진무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농협 강화군지부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 7년(1870)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훈련장을 만들면서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1876년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되면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한복판으로 요동치게 되었다.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인천, 부산, 원산을 연이어 개항했고, 다른 서양 열강 국가들과의 굴욕적인 조약과 수탈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중요한 장소가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강화의 외딴 장소라니 아이러니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 강화서문 강화읍을 서쪽으로 지나갈 때 만나는 문으로 연무당을 비롯해 우리 근대사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 운민
연무대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자그마한 개천인 동락천을 만나게 되는데 성벽은 도중에 끊기지 않고 위로 수문을 내었다. 석수문이라 부르는 이곳부터 성벽은 산자락을 따라 아찔한 경사가 이어진다. 200m로 고도가 높지 않은 강화 남산이지만 산이 매섭고 옹골차다. 과연 천년 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견뎌냈던 요새가 맞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성벽을 쌓은 조상님들에게 경외를 느끼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능선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이어가 본다. 바위 능선길에 오르다 힘이 들면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 된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강화의 풍경이 그동안의 고생을 한눈에 씻게 해준다.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인 남산의 정상에 도달하면 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위치상 가장 중요한 장대라 할 수 있으며 서해안의 방비를 담당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수행했다. 누각 자체는 병인양요(1866) 이후 허물어졌던 것을 2010년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지만 그 앞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염하 건너 김포 땅은 물론 날씨가 좋으면 북한의 개성 땅까지 바라보이니 이 순간만큼은 호사를 누리는 강화군민들이 부러웠다.
▲ 강화남문 강화 도심과 가장 근접한 위치의 강화남문은 이길을 기점으로 왕의길이 이어져있다.
ⓒ 운민
이제 올라온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끝없이 이어진 성벽을 내려가다 보면 마침 모내기철이라 염전처럼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강화의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런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고려, 조선의 권력자들은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평지로 다시 내려오니 어느덧 안파루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남문에 도착했다. 남문의 현판은 전 국무총리인 김종필의 글씨이고 바깥쪽에는 '강도 남문' 안쪽에는 '안파루'라 쓰여있다.
성문에는 수령 450년을 지닌 느티나무가 든든히 이 문을 지키면서 강화에서 펼쳐진 영욕의 현장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성벽은 견자산 자락으로 오르고 있고, 필자도 그 길을 따라 조용히 올라가 본다. 견자산 자락은 고려 무신 집권자 최우의 저택인 진양부가 있었다 전해지며 왕이 살던 궁궐보다 호화로웠다 전해진다.
지금 견자산에는 그런 자취를 찾을 길은 없었고, 6.25 전쟁 당시 전사했던 군경들을 기리기 위한 현충탑만 우뚝 서있다. 하지만 견자산에는 이 산의 명칭과 관련된 특별한 일화가 전해진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고종은 더 이상 전쟁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방치할 수 없기에 회담을 열게 되었다.
▲ 강화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산성 강화의 도심을 지키는 강화산성은 남산, 견자산, 북산을 따라 이어진 약 7km의 산성으로 수원화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 운민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고종 대신 그의 아들 안경공 창을 몽골로 보내게 되었는데 궁궐의 서쪽에는 정자가 있다 하여 정자산이라 부르는 곳에 올라가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의 행차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이어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이 산의 명칭을 아들을 바라보는 산이라 하여 견자산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많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이 산을 내려와 망한루라 불리는 동문을 지나게 된다.
2004년에 새롭게 복원한 성문으로 이 일대의 성곽 대부분이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아 길을 찾기 어려웠다. 한양을 바라본다는 명칭처럼 육지에서 강화로 들어올 때 이문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런 만큼 프랑스군이 운요호 사건 이후 진행된 조일 회담(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대표단과 군대가 입성했던 아픈 역사를 지니기도 했다.
북산 정상으로 방향을 잡고 산을 다시 오르다 보면 어느덧 북장대터가 나오며 성곽길을 마주한다. 이 일대는 북녘땅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어느덧 진송루라 부르는 북문이 나타나고 여기서 아랫길로 내려가면 벚꽃길을 거쳐 고려궁지가 있는 읍내 중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능선을 쭉 타고 내려가 첨 화루로 부르는 서문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이것으로 장장 3시간에 걸친 강화산성 트레킹이 마무리되었다. 다른 강화의 명소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곳으로 제격이지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권은 6월 중순 출판 예정입니다. 인문학 강연, 기고 문의 ugz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