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엄마가 20살 됐죠..'영감탱이' 사진보고 이젠 수줍어해요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 중앙일보 독자 서비스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 여러분의 ‘인생 사진’을 찍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인연에 담긴 사연을 보내 주세요.
가족, 친구, 동료, 연인 등에 얽힌 어떠한 사연도 좋습니다.
아무리 소소한 사연도 귀하게 모시겠습니다.
아울러 지인을 추천해도 좋습니다.
추천한 지인에게 ‘인생 사진’이 남다른 선물이 될 겁니다.
‘인생 사진’은 대형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드립니다.
아울러 사연과 사진을 중앙일보 사이트로 소개해 드립니다.
사연 보낼 곳: https://bbs.joongang.co.kr/lifepicture
photostory@joongang.co.kr
」
순애 씨는 1928년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자라고,
6.25 전쟁으로 인해 군산으로 피난 왔습니다.
전쟁 전 군산에 정착한 순애 씨 언니 부부 집에
대가족이 얹혀살게 된 겁니다.
그러던 중 학벌 좋고, 잘생긴 데다 돈 많은 남자가
순애 씨에게 반해 매파를 넣었습니다.
순애 씨 언니는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순애 씨를 결혼시켰습니다.
서울에서 애 둘을 낳아 키우며 살다
남편의 고향인 고창으로 순애 씨는 내려갔습니다.
아마 순애 씨는 고창에 갔을 때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남자는 고향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취미 생활을 영유하며,
많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급기야 자녀가 다섯이 되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고생하던 순애 씨가 가진
남편에 대한 마음은 “영감탱이”라며
한숨짓는 데 다 담겨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녀들은
그것이 남편을 향한 미움,
한탄 그리고 원망이라 생각했습니다.
순애 씨는 자녀의 초청으로
1990년 미 동부로 갔습니다.
뜻하지 않게 자녀의 항암 과정을 지켜야 했고,
그것을 이겨내고 안정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자녀가 돌도 안된 아기를 안고
이민차 미국으로 왔습니다.
이렇게 이민 온 자녀의 아기들과 살림 또한
순애 씨 몫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 30년 넘게 살다
이제 백 세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순애 씨는 고향인 개성은 못 가지만,
남편의 고향인 고창은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코로나가 한창인 2021년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국으로 오는 길에 교차할
수많은 만감과 희망을 품은 채 비행기에 탄 순애 씨가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모든 기억을 비행기 안에 놓고 내리고 말았습니다.
한국으로 오면서 가졌을 설렘도,
옛 추억도, 희망도,
아픔도 그리고 기쁨도 다 거품이 된 겁니다
24시간도 안 되는 비행에
수십 년을 놓고 내려버린 겁니다.
그 짧은 비행시간 동안
순애 씨 치매가 급속히 진행돼 버린 게죠.
다행히도 순애 씨는 한 가지를 기억했습니다.
순애 씨의 남편,
‘영감탱이’라 부르며 원망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그 남자가 잘해줬던 기억으로
또 다른 설렘을 갖게 된 겁니다.
그 순애 씨와 함께한 저는
그 ‘영감탱이’ 속에
원망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순애 씨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모든 자식조차 기억 못 하는 순애 씨에게
자신에게 아픔을 줬던 그 남자만 남은 겁니다.
그 순애 씨의 삶을 인생 사진으로 위로하고,
또 새로 얻은 하나의 삶을 기록해두려
사연을 보냅니다.
막내딸 선경 씀.
고창에서 막내딸을 만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A : “‘엄마 식사하세요’라고 말하면 엄마가 대답을 안 해요. 그러면서 자꾸 부르면 ‘나보고 하는 소린가?’라며 되묻죠. 제가 자식인 걸 모르시는 거죠.”
Q : “혹시 돌쟁이 안고 미국 이민 간 딸인가요?”
A : “네. 맞아요. 제가 막내예요.”
Q : “어머니가 고창으로 오신 구체적인 까닭이 뭐죠?”
A : “미국에서 엄마 치매가 시작되었어요. 옛 고향 집이 있는 고창으로 오면 엄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한순간에 모든 기억을 내려놓으실 줄 몰랐습니다.”
Q : “사실 치매 환자 돌보는 게 쉽지 않을 터인데…. 더구나 따님에겐 미국이 터전인데 어머니를 어찌 돌보시려고요?”
A : “제가 이참에 여기서 엄마를 모시고 돌보려고요. 엄마가 그동안 저와 언니는 물론 모든 손자를 다 돌보셨으니 앞으로는 제가 엄마를 돌봐야죠. 이제는 엄마를 제 자식처럼 생각하려고요. 엄마가 저희에게 그랬듯이요.”
막내딸은 요즘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엄마를 모시면서도
몇십년 방치해둔 해둔 집을 고치고,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정원을 가꾸느라
손 놀릴 틈이 없는 겁니다.
사실 화장실에 가보고서 알았습니다.
화장실에조차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꽂아 놓을 정도였습니다.
세심한 부분까지 마음 쓰는 게
느껴지고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딸은 스스로
아직도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A : “실내화를 신고 엄마가 마당으로 막 내려옵니다. 수돗물을 틀어 놓고 그냥 나오고요.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역정 내며 큰소리를 냅니다. 엄마에게 받은 만큼 한다는 게 마음뿐이지 잘 안 됩니다. 늘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순간 닥치면 그리되니 한참 멀었습니다.”
Q : “그렇게 모든 걸 다 잊으셨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게 놀라운데요.”
A : “아버지가 마지막까지도 엄마를 힘들게 하셨어요. 여러 가지로요. 엄마의 모든 고생은 아버지 때문이었죠. 그러니 저는 아버지가 미움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아버지 사진을 보고 엄마가 수줍어해요. 사진 보면서 너무 좋아하기까지 하고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잘해줬던 이야기를 해요. 정말 의외이고 놀랐어요. 한편으로는 돌아가시기 전에 너무 힘들고 아픈 기억보다 어쩌면 좋은 기억 가지고 가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엄마의 손때가 묻은 집에서 사진을 찍고
청보리 하늘거리는 학원 농장으로 나들이했습니다.
모녀가 손을 잡고 보리밭길 사이를 걷는 모습을 찍는데
노랫가락이 들렸습니다.
옛날 유성기에서 듣던 목소리와 똑같았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바로 어머니가 부른 노래였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가사와 낭랑한 소리에
짐짓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흔다섯해 삶을 되돌아 스무살의 봄으로 돌아온 순애 씨’
Q : “어머니께서 노래를 참 잘하시네요?”
A : “예전에 간호학교 다닐 때 가수 제안을 받으셨데요. 그 사실을 안 외할머니가 가수 못하게끔 엄마를 기숙사에서 빼돌리셨다고 하더라고요.”
이어지는 어머니의 노래는 ‘알뜰한 당신’이었습니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그 누가 알아주나요~~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이 가사에도 당신의 삶이 배어있었습니다.
청보리밭을 지나니 유채꽃밭이 나타났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니
예서 사진을 하나 찍자고 제안했습니다.
먼발치 밭두렁 사이로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에
제 눈이, 제 마음이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밭두렁으로 어머니를 한발 한발 이끄는 딸의 모습,
“이젠 엄마를 내 아이처럼 보살피겠습니다”라고 했던
딱 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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