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빌딩 세우면 부자" 한옥명소 서촌, 오늘도 기와장 뜯긴다

최서인 2022. 5. 2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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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존된 한옥. 꼬마빌딩 可.’

지난주 서울 종로구 서촌 부동산에는 이런 광고가 붙어 있었다. 서울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은 이후 개발 기대감과 유동인구 증가 등으로 들썩들썩한 동네 분위기가 묻어난다. 청와대 개방으로 하루 4만명 인파가 서촌에 유입되면서 기대감은 더 커졌다. 서촌의 부동산 호가는 최근 들어 10~20% 뛰었다고 한다. 기대감으로 한옥에 관심이 커진 것은 양면성을 가진다. 한옥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서촌 고유의 한옥과 풍경이 더 빠르게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루 4만 서촌 유입…한옥 쓰러진 자리 빌딩이


지난 2019년 한옥 네 채를 철거하고 있다. 부서지다 만 서까래가 엿보인다. 한옥이 헐린 자리에는 2020년 꼬마 빌딩 두 채가 들어섰다. 지금도 한옥들은 '꼬마빌딩 건축이 가능한 곳'으로서 매물로 나와 있다. [이서재 씨 제공]

“어느 날 창밖을 보니 이웃집에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있었어요.”

한옥에 살면서 도자기를 만들고 동양화를 그리는 이서재(활동명)씨의 말이다. 서촌 주민들은 “안 그래도 위협받던 한옥들의 설자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서재씨의 이웃집에는 원래 한옥 네 채가 있었는데, 2020년 다 헐리고 그 자리에 3층짜리 ‘꼬마 빌딩’ 두 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서촌 일대는 2010년 ‘한옥보존구역’으로 지정됐다. 한옥보존구역은 ‘지정’과 ‘권장’ 구역으로 나뉜다. 한옥지정구역에는 한옥만 신축이 가능하지만, 한옥과 비한옥이 공존하는 ‘한옥권장구역’에는 2~3층 층수 제한이 있을 뿐 양옥도 신축할 수 있다.

지금은 헐린 이서재씨의 이웃집도 권장구역에 있던 한옥이었다. 그는 “지금도 공사장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친구들이 ‘너무 변해 길을 못 찾았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올릴 수 있으면 올리는 게 당연”…한옥 50여 동 사라져


지금은 꼬마 빌딩이 올라간 자리에 원래 있던 한옥. [이서재 씨 제공]

부동산 업계에선 2~3층을 지을 수 있는 땅에 한옥을 짓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게 정설이다. 공인중개사 A씨는 “한옥을 지으면 용적률과 건폐율 측면에서 손해다. 특히 요즘같이 땅값이 비쌀 땐 당연히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양옥을 짓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한옥권장지구가 사실상 ‘한옥을 허물어도 되는 곳’이란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

2015년 한옥전수조사에 따르면 서촌에 남은 한옥은 616동이다. 2010년 조사 이후 50~60동가량 줄었다. 주민들은 마지막 한옥전수조사인 2015년 이후에도 한옥 십수 채가 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일반 시민에게 청와대 문이 열린 이후 첫 일요일인 지난 15일 오후 청와대 앞이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서촌의 한옥에 사는 노모(39)씨는 “허물고 건물을 올리면 임대 수익이 월 수백만 원이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참고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더 유입될 테고,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옥보존구역’ 해제를 바라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인근 부동산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서울 강남 등지에서 유입된 외지인 지주들은 2~3층 빌딩의 씨가 마르자 ‘꿩 대신 닭’ 격으로 한옥권장지구의 한옥들을 매입해 꼬마빌딩을 지었다. 큰돈을 번 외지인들을 지켜보는 주민들의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다는 게 부동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난해 10월엔 한옥보존구역 해제를 위한 주민 동의서가 돌기도 했지만, 반대하는 주민들이 더 많아 불발됐다. 지금은 올해 가을 제출을 목표로 새로운 전단지가 돌고 있다고 한다.


한옥을 새로 지어? “가물에 콩 나듯 해”


지난 3월 서울 시내 한 부동산 중개업소 모습. 연합뉴스
한옥을 현대식으로 잘 지으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해법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신축은 “가물에 콩 나듯 하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한옥은 평당 건축비가 양옥의 세 배에 이르는 데다 관리가 까다롭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한옥을 신축할 때 최대 1억8000만원의 지원이 있지만, 나서는 이는 많지 않다. 한 공인중개사는 “부자들이 세컨하우스로 짓는 경우가 아니면 한옥을 신축하는 이들이 드물다”고 말했다.

한옥에 거주하는 주민 이영석(61)씨는 “한옥을 좋아하고 한옥에 계속 살고 싶지만, 서촌 한옥들은 과거부터 좁게 설계돼 대부분 15~18평 선이라 가족들과 살기에는 좁다”며 “2층 한옥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유인책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지구단위계획에 따르면 너비가 4m 이상인 길에 접한 한옥만 2층을 올릴 수 있다.

서촌에서 45년을 살아온 주민 박모(67)씨는 “지난 20년간 이미 한옥 사이사이로 빌라면 빌라. 상가면 상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차라리 재개발 지구에 한옥마을을 따로 조성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냈다.


‘꾼’들 떠난 뒤 서촌의 색은 뭘까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일대의 한옥지정구역 골목길의 모습. 한옥지정구역에는 한옥만 지을 수 있지만 한옥권장구역에는 비한옥도 지을 수 있다. 최서인 기자
서촌 주민 노씨는 “청와대 개방 후 발에 채는 쓰레기와 소음도 신경 쓰이지만, 문제는 ‘꾼’들이 떠나고 난 뒤의 서촌의 모습”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이렇듯 하나둘 한옥을 잃다 보면 서촌의 이미지는 소진되고 너도나도 ‘규제 풀어달라’는 분쟁만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서재씨는 “한 번 높아진 건물이 낮아질 리 없다. 서촌을 방문하는 이유는 동네의 아름다움 때문이고 거기에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색을 잃어 가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최서인 기자 choi.seo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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