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싸울 수 없다" 우크라전 거부..목숨 걸고 사표 쓴 러 장교

추인영 입력 2022. 5. 23. 17:21 수정 2022. 5. 23. 17: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외곽의 아조브스탈 제철소 인근에서 모습을 보인 친러시아군대 호송대.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나는 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다.”

우크라이나 모처에 숨어 수류탄 상자를 침대 삼아 쪽잠을 자고 현지인들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이 러시아 장교 A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씻지 못해) 더러웠고 피곤했다. 주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그 일부였다”면서다. CNN은 22일(현지시간) A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과 사직까지 과정을 소개했다. 신변 보호를 위해 A의 이름과 개인정보는 밝히지 않았다.


휴대전화 제출…Z 작업 후 크림반도로


A는 지난 2월 22일 다른 대대와 함께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갑작스러운 명령에 따라 휴대전화를 제출한 뒤 그날 밤 몇 시간 동안 군용 차량에 흰 줄무늬를 칠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줄무늬를 지우고 ‘Z’를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루 뒤(2월 24일)엔 크림반도로 배치됐다. 그는 “솔직히 나는 우리가 우크라이나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외곽의 아조프스탈 제철소 인근을 지나는 친러시아군. 로이터=연합뉴스

그의 부대가 크림반도에 도착했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A와 군인들은 이에 관한 소식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진입을 명령받은 건 이틀 후였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진입을) 거부하면서 사직서를 쓰고 떠났다”며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그냥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우크라이나로) 갔다”고 말했다. 여전히 무엇을, 왜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탈나치화’ 같은 주장들조차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린 대부분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죽지 않은 건 기적…살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2월 27일, 그가 기억하는 첫 장면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러시아 배급 상자와 파괴된 장비 더미였다. 그는 “나는 카마즈(군용 트럭)에 앉아 총을 단단히 잡고 있었고, 권총과 수류탄 두 개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탄 차량이 헤르손의 한 마을에 접근하자 채찍을 손에 든 남성이 뛰쳐나와 호송대를 채찍질하기 시작했고 울면서 군인들에게 “당신들은 XXX”라고 소리쳤다. A는 “어떤 사람들은 옷 안에 무기를 숨겼고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총을 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숨어 지냈다.

두 번째, 세 번째 날 공격의 수위가 심해졌다. 이들을 겨냥한 박격포 공격도 있었다. A는 “우리 중 누구도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며 “첫 일주일 동안은 멍한 상태였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죠. ‘오늘은 3월 1일이다. 내일 나는 일어날 것이고, 3월 2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또 다른 날을 사는 것이다’.” 어느 날엔 전투 보너스 지급 소식에 “여기서 15일만 더 버티면 대출 다 갚겠다”면서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라디오 뉴스 듣고 “죄책감”


지난달 6일 수습된 우크라이나 부차 대학살 피해자 시신. EPA=연합뉴스
상황 파악이 된 건 몇 주 후였다. 수리가 필요한 장비를 들고 후방에 더 가까이 배치됐을 때다. A는 “우리는 라디오 수신기로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 상점이 문을 닫고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며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왔다는 이유로 죄책감은 더 컸다”고 했다.

그는 결국 용기를 내 사령관을 찾아가 사직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사령관은 “불가능하다”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A는 “사령관은 ‘형사 재판이 있을 수 있다. 사직은 배신’이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며 “사령관이 종이와 펜을 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는 “정치는 모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외교를 통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고 했다.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집에 돌아올 수 있어 기쁩니다.”

한편 러시아 군인의 무단결근은 징역형이 가능한 형사 범죄다. 발렌티나 멜니코바 러시아군인어머니회 사무총장은 CNN에 “수많은 장교와 군인이 사직서를 쓰고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용병들은 계약 10일 이내에 동기를 밝히고 사임할 수 있다. 인권운동가 알렉세이 타발로프는 “(사직한 군인의) 수는 1000건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모집 중인 용병은 대부분 가난한 지역 출신이라고 그는 밝혔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