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달러에 '테킬라 위기' 재현되나..유동성 파티 끝나자 신흥국 통화 가치 뚝

명순영 2022. 5. 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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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금리를 올리며 신흥국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신흥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며 경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매경DB)
돈 잔치는 끝났고 유동성은 점점 말라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예상보다 빠르게 돈줄을 죄고 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금리 인상 신호를 던진다. 지난 5월 17일에는 “물가 상승률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려가는 것을 볼 때까지 계속 (금리 인상을) 밀어붙이겠다”고 했다.

5월 초 기준금리를 50bp(0.5%포인트, 1bp=0.01%포인트) 인상한 파월 의장은 6월과 7월에도 이와 같은 ‘빅스텝’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가 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금리 인상 의지는 아주 확고하다.

연방준비제도는 지난 5월 4일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을 밟았다. 이어 올해 두세 차례 추가 빅스텝(점보스텝)을 예고했다. 미국이 오는 6·7월 연이어 빅스텝을 밟고, 남은 회의(9·11·12월) 때마다 금리를 0.25%포인트 올린다면 연말 금리 상단은 연 2.75%에 이른다. 연초 제로(연 0~0.25%) 수준이었던 미국 기준금리가 1년 만에 연 3%(상단 기준)선에 바짝 다가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자 미 달러 가치는 역대 최고 수준으로 솟구쳤다. 반면 신흥국 통화는 맥을 못 추면서 ‘테킬라 위기’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신흥국 통화 25개로 구성된 MSCI 신흥국 통화지수는 5월 17일(현지 시간) 1675.99다(인베스팅닷컴). 4월 초(4월 4일 종가 1746.64)와 비교하면 한 달 사이 4% 넘게 하락했다. 홀로 날아오르는 ‘슈퍼 달러(달러 강세)’와 비교된다.

5월 17일(현지 시간) 유로와 일본 엔 등 주요 여섯 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1973년=100)는 같은 기간 5% 오른 103.54를 기록했다. 2002년 12월 13일(103.98) 이후 19년 5개월 만에 최고치다.

테킬라 위기는 1994년 멕시코 외환 위기를 말한다. 당시 도화선도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었다. 연방준비제도는 1994년 2월부터 1년 만에 6차례에 걸쳐 금리를 연 3%에서 6%로 2배 끌어올렸다. 당시 연준의 신속한 긴축은 미국 경제 불황을 피하고 인플레이션을 잠재우는 연착륙을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 달러화 강세와 미국 국채 수익률 상승은 신흥국 자금 이탈로 이어졌고 멕시코와 남미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이는 1997년 태국, 필리핀을 거쳐 한국까지 연쇄적으로 위험에 빠뜨렸다. 1998년 러시아와 1999년 브라질 위기 역시 시작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었다. 당시 이런 현상을 두고 ‘멕시코의 전통술 테킬라에 취한 것 같다’고 해 ‘테킬라 효과’로 불렀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진짜 위기는 내년부터”라고 예견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경제에 낀 거품이 붕괴되며 공황 수준의 경기 침체가 올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는 “미 정부와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20년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돈을 엄청 풀어 금융 시장에 거품을 형성했다”며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자산 가치가 하락하고 소비와 투자가 줄며 침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렇게 되면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자본 유출로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 국채 실질 수익률 상승세

▷신흥국 돈 피난처 찾아 본격 이동

실제 미국 금리가 치솟으면서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 국채 실질 수익률이 높아지면 돈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옮겨 간다. 저금리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흥국으로 향했던 글로벌 자금의 이탈이 본격화한다는 의미다.

미국 10년물 국채의 실질 수익률은 최근 한 달여 동안 -1.1%에서 제로(0)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미국 인플레이션은 40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10년 이후의 인플레이션 기대치 역시 25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이처럼 심각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이라면 미국은 금리 인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달러 빚이 많은 신흥 시장은 달러 대비 통화 가치가 급락(환율 상승)하며 빚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저금리를 활용해 신흥국 정부와 기업은 부채를 늘렸다. 달러가 약세일 때 이 같은 전략은 돈의 효용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미국 채권 수익률과 달러 가격이 치솟으며 신흥국의 성장과 전반적 부채 지속 가능성을 압박하고 있다.

IMF 역시 신흥 시장이 세계 금융 상황의 긴축에 취약하다고 경고했다. IMF에 따르면, 신흥국 공공부채는 GDP 대비 66%로 2008년 이후 사실상 두 배로 늘었다. 폭발적인 부채는 2008년 위기 이후 세계 금리가 사실상 제로(0)로 붕괴됐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이 둔화하며 IMF는 신흥국의 GDP 대비 부채가 2027년까지 75%를 향해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판단한다.

전 세계 450여개 민간 은행과 투자 회사들이 회원사로 참여한 민간 국제금융기관 연합체 국제금융협회(IIF)는 지난 5월 18일 ‘1분기 글로벌 부채 동향 보고서(Global debt monitor)’를 냈다. 이 협회의 분석도 다르지 않다.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IIF가 조사 대상으로 삼는 전 세계 36개국(EU는 27개국을 단일 국가로 간주)에서의 총부채가 1분기에 305조달러를 기록하며 또다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1년 만에 3조3000억달러가 늘어난 것. 이 중 2조5000억달러가 중국에서, 1조8000억달러가 미국에서 증가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신흥국 총부채도 역사상 처음으로 100조달러 진입을 눈앞에 뒀다는 점이다.

특히 내년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신흥국 채권과 대출금이 총 9조달러에 달한다는 점이 불안 요인이다. 이 가운데 85%가 현지 통화 부채다. 하지만 1조달러 이상이 미국 금리 상승에 노출됐다.

보고서를 총괄한 엠레 티프틱 IIF의 지속 가능성 연구 책임자는 외화 차입에 더 많이 의존하는 국가들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 경제가 더 큰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많은 신흥국 국가들이 단기 국채로 자금 조달에 나서고, 이들 부채는 금리가 상승하는 환경 속에서 상환돼야 하기 때문에 재정수지에 큰 부담을 준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 장기화하는 중국의 코로나 봉쇄도 신흥국 경제에 악재다. 세계의 공장이자 수출 시장인 중국이 멈춰 서면 공급망 병목 현상이 커진다. 수입 물품 가격이 오르고 신흥국의 대중 수출에 차질을 빚는다.

피델리티는 “역사적으로 미국 달러 방향은 신흥 시장 자산 성과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장기간 미국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 신흥국 시장 주식은 보통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 신흥 시장 경제는 일반적으로 통화 방어를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주식 등 자산 시장이 타격도 감내해야 한다. 실제 빨라지는 미국 긴축에 대응하기 위해 신흥국은 앞다퉈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불붙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고,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5월 4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2.75%로 단숨에 1%포인트 인상했다. 지난해 3월(연 2.75%) 0.75%포인트 금리를 올린 이후 10차례 연속 인상이다. 인도도 기준금리인 정책 레포금리를 4%에서 4.4%로 0.4%포인트 올렸다. 2018년 8월 이후 첫 인상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4월 기준금리(47%)를 2.5%포인트나 올렸다. 올해 들어 4번째 인상이다.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며 방어선을 쌓고 있지만, 일부 신흥국 통화 가치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인도 루피화는 최근 처음으로 달러당 77루피 선을 뚫고 5월 18일 기준 77.82루피까지 내려앉았다. 역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5월 18일 기준 달러당 118.02페소를 기록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20년 초(달러당 59.87페소)보다 2배 가까이 하락했다. 원화 가치도 강달러 흐름 속에 속절없는 하락세를 보인다. 원화값은 1276원대를 기록 중이다. 장중으로 따지면 한때 2020년 3월 이후 최저치인 1290원대까지 뚫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현재의 신흥국 통화 가치 하락세를 위기로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금리 인상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일시적인 변수가 달러 가격을 과도하게 밀어 올렸다는 이유에서다. 전쟁이 끝나는 등 대형 악재가 해소되면 달러 가치도 어느 정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신흥국 통화 가치 하락도 진정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美 연준의 인플레이션 대응 늦었나

버냉키 전 의장 “파월의 실수…스태그플레이션 우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실수를 저질렀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지난 5월 16일 경제전문매체 CNBC와 인터뷰에서 현 연준을 작심 비판했다. 그는 “문제는 (연준이 높은 인플레이션에 미리 긴축으로 대응하지 않고) 왜 정책을 지연했느냐인데, 되돌아보면 그것은 실수였다”고 했다. 연준이 긴축 시기를 놓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높은 물가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버냉키는 2006년부터 8년간 연준을 이끌며 글로벌 금융 위기 국면을 지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양적 완화(QE)를 이끈 이가 버냉키다.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는 것처럼 과감한 양적 완화를 단행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기준금리 수준이 이미 너무 낮아 인하를 통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즉 단기 채권을 통한 정책 여력이 사라졌을 때 장기 채권을 직접 사고파는 방식의 양적 완화 정책을 썼다. 장기 채권 시장은 중앙은행 영역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롬 파월 현 의장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버냉키보다 더 강력한 양적 완화를 펼쳤다. 다만 ‘역대급’ 돈 풀기 이후 거둬들이는 타이밍을 놓쳐 물가 폭등을 불렀다는 지적 역시 거세다. 최근 금융 시장 불확실성이 심해진 것은 파월의 ‘실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전 연준 의장이 이례적으로 현 연준 의장을 공개 비판한 건 이 같은 급박한 경제 상황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버냉키는 “(긴축 지연이) 실수였다는 걸 그들이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파월이 이끄는 연준이 왜 기다렸는지 이해한다”고 말했다. 파월은 2013년 연준 이사로 테이퍼 탠트럼(긴축 발작)을 경험했는데 이 같은 시장 충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테이퍼 탠트럼은 양적 완화로 풀린 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신흥국 통화 가치와 주가가 폭락했던 현상이다.

버냉키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긍정적인 시나리오에서도 경기 둔화는 불가피하다고 봤다. 또한 향후 1~2년간 성장률은 낮고 실업률은 약간 높고 인플레이션은 계속 고공행진을 하는 시기가 있을 텐데, 이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업은 일부 사람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은 실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반응하지는 않는다”며 “인플레이션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실업보다 인플레이션의 사회적 충격이 더 크다는 의미다. 실제 올해 11월 중간 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명순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0호 (2022.05.25~2022.05.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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