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판결문은 왜 유출됐을까

박태인 입력 2022. 5. 23. 00:18 수정 2022. 5. 23. 05: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태인 정치팀 기자

그는 왜 기자를 찾았을까. 이달 초 낙태권(임신중단 권리)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려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문 초안이 유출됐다.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이를 특종 보도한 폴리티코는 ‘사건 관계자’에게 초안을 입수했다고 썼다. 대법원이 수사를 의뢰했으니 제보자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도 이런 극단적 방법을 택했으니,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판결문의 내용을 보며 유출 이유를 설명하는 이도 있다. 초안을 작성한 보수 성향의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낙태권의 박탈이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이라 설파한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당시 미국 대법관들이 7(찬성):2(반대)라는 압도적 표결로 보장한 여성의 헌법적 권리를 법원이 아닌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얼리토의 이런 논리는 동성결혼 등 다른 소수자의 권리를 박탈하는데도 적용될 수 있다. 지금 많은 주의 대표자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추종자다. 그와 반대 진영에 있는 이들에겐 견딜 수 없는 법 논리다. 그러니 올해 11월 중간 선거 전 여론을 환기해 ‘판례 뒤집기’를 막으려 했단 것이다.

낙태권 관련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뒤 대법원 앞에서 낙태 찬반론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제보자는 언론에 터트리는 것 외에는 낙태권을 공론화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미국 사회는 낙태와 같은 사회적 쟁점을 해결할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정치권은 갈등을 조정하는 곳이 아닌 폭발시키는 곳이 됐다. 미국 의회엔 낙태권을 법으로 명문화할 수 있는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다. 대법원에 기댄 채 수십년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정치인은 없었다. 초안이 유출된 뒤에야 민주당에서 낙태권을 연방법으로 보장하려는 ‘건강보호법안’을 제출했지만 49(찬성):51(반대)로 부결됐다. 부결이 예상된 터라 사실 쇼에 가까웠다.

한국도 상황은 반대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2020년 말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했다. 국회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검수완박을 두고 한 국민의힘 의원은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2014년 헌재가 일부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국회는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위헌인 법이 그대로니 실시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글픈 코미디다. 우리 정치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얼리토 대법관이 말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판결문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 아닐까. 현실 속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이들은 망가져 버린 지 오래다. 정치가 갈등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제보자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을 테다. 유출만으로도 추락할 대법원의 신뢰 역시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다. 판결문 유출은 망가진 정치가 초래한 예고된 재앙이다. 우리 역시 피해가기 어려운 가까운 미래다.

박태인 정치팀 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