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만 가면 구토, 의사가 준 의외의 처방전
"나를 추앙해요." JTBC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의 대사가 자주 회자된다. 출퇴근만 4시간, 무표정에 화조차 내지 않는 미정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추앙'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상대방에게 미정은 "응원하는 거, 뭐든 할 수 있다, 응원하는 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번아웃'을 경험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왜그러냐는 채근도, 걱정도, 질책도 아닌 '괜찮다, 할 수 있다'는 응원 아닐까. 그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편집자말>
[이다혜 기자]
"정말 지긋지긋해."
일하면서 진심으로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한 건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회사를 퇴사할 즈음, 또 한 번은 프리랜서로 과노동에 시달릴 때. 지긋지긋하다는 말만 내뱉지 않았다. 동시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5분에 한 번씩 멈춰 서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입으로 계속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컴퓨터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원사업 정산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고, 이 지긋지긋한 작업이 언제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 JTBC <나의 해방일지> 한 장면. |
ⓒ JTBC |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2화에서 염미정은 동호회 가입을 계속해서 권하는 행복지원센터 상담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지쳤다고.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라고.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염미정이 이제서야 번아웃이 왔다는 게 신기하다. 왕복 4시간 거리의 회사에 오가며, 주말에는 아버지의 일을 돕고,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우면서 힘듦을 삼키는 사람. '번아웃을 경험하기 위한 OO가지 방법'이라는 기사를 쓴다면 염미정의 일상을 줄줄 나열하면 될 정도다.
회사에 다닐 때 구토하듯 퇴사했던 이유가 어쩌면 번아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알게 된 건 프리랜서로 일하며 두 번째 번아웃을 경험하면서다. 회사원으로 경험한 번아웃과 프리랜서로 경험한 번아웃은 다른 듯 비슷했다. 마음이 바빴다. 오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산재해 있었다. 종일 열 시간을 넘게 일해도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찝찝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마음이 바쁘니, 친구를 만나 힘듦을 토로할 여유가 없었다. 염미정의 말처럼 모든 관계가 노동이고, 모든 시간이 노동이었다. 친구를 만나 힘듦을 토로하는 것조차 노동이라고 느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운동도 취미도 휴식도 모든 게 노동처럼 느껴졌다. 체중이 건강하지 않게 10kg 정도 줄고, 건강이 악화되고 무엇보다 한 문장도 쓰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며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회사에 다닐 때 지독한 번아웃은 퇴사하며 치유됐다. 정신과 선생님의 말을 빌려오면, 우울증은 우울을 야기하는 상황을 벗어나면 빠르게 호전될 수 있다고 한다. 번아웃도 마찬가지였다. 퇴사로 번아웃을 야기했던 상황, 지나치게 많은 업무와 부담스러운 책임감을 벗어던지자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역시 퇴사는 만병통치약인가.
문제는 두 번째 번아웃이었다. 나는 퇴사하지 못하는 회사에 갇힌 프리랜서. 번아웃을 야기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계속 일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컸다. 일이 지긋지긋하다며 눈물을 줄줄 흘린 후에도 새로운 일이 들어오는 걸 막지 못했다.
새로운 일이 들어온다는 건 돈을 번다는 의미니까. 꾸역꾸역 외주를 받았다. 문제는 일을 받은 이후였다. 지독한 번아웃으로 인지능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평소 낼 수 있는 퍼포먼스의 30%도 발휘하지 못했다. 하루에 한 문단을 겨우 썼다. 그마저도 엉망이었다. 도통 이 일을 끝낼 수 없다는 불안감이 증폭됐다. 결국 정신과와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취미를 가져보면 어때요?"
"취미…요? 저 취미가 없어요."
휴식을 해보라는 말에, 가만히 있으면 계속해서 머릿속에 일 생각이 떠올라 도통 쉴 수 없다고 하니, 상담 선생님은 일에 매몰되지 않게 취미를 가져보면 어떤지 물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취미도 없이 일하고 있었구나. 나는 다시 물었다.
"선생님 취미는 무엇인가요?"
선생님이 답했다.
"산뜻한 시간을 가져보세요."
산뜻한 시간이라. 산뜻한 시간은 무엇인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기정, 염창희, 염미정 삼 남매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번아웃 혹은 반복된 일상의 지루함에 빠져 허덕인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염기정은 겨울에는 누구든 사랑하겠다며 사랑을 해방구로 찾는다. 염창희는 차를 사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으로 일상의 답답함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염미정은 추앙받기를 원한다. 절대적인 지지와 응원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면 번아웃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지 기대하며.
▲ JTBC <나의 해방일지> 한 장면. |
ⓒ JTBC |
나의 해방구는 캠핑이었다. 캠핑은 산뜻한 시간에서 파생됐다. 산뜻한 시간을 몇 번이고 곱씹었지만, 도무지 그런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쯤 몇 년 만에 캠핑하러 갔다. 캠핑장에 도착해 분주하게 집(텐트)을 짓고, 쉼터를 정리했다. 캠핑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따고 멍하니 캠핑장 사이트 앞 우뚝 선 나무를 쳐다봤다.
아주 오랜만에 일 생각이 멈췄다. 캠핑이라는 활동이 그렇다. 분주하고 멍한 상태가 반복되는 활동. 바쁘게 움직여 음식을 해 먹고, 먹고 나면 다시 멍한 상태로 화로대에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거나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활동. 그 가운데 일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다시 간 상담에서 상기된 채 말했다.
"선생님 제 산뜻한 시간은 캠핑이더라고요."
'캠핑'이 상징하는 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번아웃이 오기 직전 나는 어렵사리 떠난 해외여행에서도 5분에 한 번씩 메일을 확인했다. 누군가 식사를 제안하면 바빠서 어렵다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가지고 있는 만성질환을 관리하기 위해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이마저도 바쁘다는 이유로 건너뛰었다. 모든 게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에서 온 분주함 때문이었다.
잠시간의 해방이 필요하다. 번아웃은 해방구 없이 내가 나를 몰아붙일 때 왔다. 두 번의 지독한 번아웃과 2년간의 번아웃 후유증을 겪은 후 나는 일상에 숨 쉴 틈을 만드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캠핑을 가고, 따뜻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때로는 아무 일 없이 있는다. 일이 많아도 저녁에는 퇴근하고 주말에는 쉰다. 여전히 일은 많다. 프리랜서에게 일이 많다는 건 '사람이 숨을 쉰다'와 같이 특별한 것 없는 상태다. 이 많은 일을,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을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 여전히 불안하다.
차이점이라면 일상의 산뜻한 해방구가 있어 지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계속 살아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에게 산뜻한 해방구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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