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심장엔 사랑을 이식했어요" 아이티 심장병 어린이들이 만난 기적
12년 전 22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지진을 겪고, 국민 대부분이 하루 2달러로 살아가는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 아이티. ‘작은 신음’에도 ‘의료적 응답’을 받지 못해 생명을 잃는 이들이 수없이 많은 이곳에서 수술이 필요한 질병은 곧 죽음과 다름없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은 성도들의 마음은 벼랑 끝에 있던 아이티 어린이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18일 오후, 경기도 하남의 한 주택 입구에 다가서자 미닫이문을 열고 취재진을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지난달 16일 아이티에서 온 라투(2)군이었다. 라투군을 따라 들어간 집 안엔 5명의 아이와 어머니들이 있었다. 모두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 최근 한국에서 수술을 받은 아이들이다.
“라투가 지금은 저렇게 웃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좌심방 우심실 사이에 큰 구멍이 나서 피가 위아래로 섞여서 조금만 움직여도 발작을 일으키던 아이에요. 폐동맥 협착에 대동맥 기승까지··· 수술 전까지 6명 중에 가장 상태가 위독했었지요.”
아이티 구호단체 DFI(Development for Freedom International)의 대표로 11년째 사역해 온 헬렌 김(56) 선교사는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며 이들의 기적 같았던 치료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아이티에선 신생아의 약 5%가 심장병 질환을 갖고 태어나고 연간 1만3000명 넘는 국민들이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사망한다”며 “대부분 영양부족이 원인인데 한국 임산부들에겐 엽산이 필수영양소로 여겨진 지 오래지만 아이티에선 극소수만 섭취할 수 있는 귀한 영양소”라고 설명했다.
사역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98명의 심장병 어린이를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과 치료를 지원했지만 지난 2년여 간은 김 선교사에게도, 치료를 기다리는 아이와 가족들에게도 가혹한 시간이었다. 코로나 펜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수술이 예정됐던 환자들의 한국행이 전면 취소됐기 때문이다. 김 선교사는 “이번에 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은 2~8세의 아이들 6명이 2019년 6월 이후 멈췄던 사역의 재개를 알리는 첫 번째 사례였다”며 감격을 전했다.
심장병 수술의 경우 통상 입국한 뒤 수술, 퇴원, 외래 진료까지 1개월여 과정이 필요하다. 수술 대상 어린이와 보호자의 항공료, 숙박, 식사비를 고려하면 적잖은 재정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이번 여정을 위해 다니엘기도회(준비위원장 김은호 목사)와 삼성서울병원이 ‘키다리 아저씨’로 나섰다. 지난해 11월 진행된 기도회 기간 동안 모인 ‘사랑의 헌금’ 중 3억원을 이번 수술을 위해 지원하기로 하면서 극적으로 아이들의 한국행이 이뤄졌다.
기적적으로 한국행이 결정됐지만 또다른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정치, 사회적 혼돈을 틈타 갱단이 아이티 전역을 점령하다시피 하면서 국내 이동에 제동이 걸렸다. 한국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아이티 내에서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던 매클레이(2)네 가족의 경우 지역 공항을 점령한 갱단이 항공기를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미국을 경유해 한국과 아이티를 왕복해야 하는 여정이라 미국 대사관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발을 동동굴러야 했어요. 결국 승합차 운전사 한 명을 급히 고용해 갱단의 공격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야밤에 게릴라 작전하듯 산을 넘어서 이동해 겨우 도착했지요.”
한국에서 머물 곳을 찾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4월 초까지만해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수술을 앞둔 어린이들과 외국인 부모 여러 명이 1개월 이상 머물 수 있는 공간을 구할 때마다 집주인들이 난색을 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를 얻은 곳이 취재진이 이날 방문한 주택이었다.
김 선교사(사진)는 “아이들에게 아늑한 공간이 돼줘서 좋기도 했지만 수술 후 집에서 회복 기간을 가질 때 밤에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집주인 아저씨께서 직접 차에 태워 병원에 데려다 주시는 등 감사함이 큰 곳”이라고 밝혔다. 집주인 이병훈(가명·62)씨는 “아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아이티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왔는데 머물 곳이 없다기에 집을 내줬는데 정말 잘 한 일 같다”며 “교회를 다니진 않지만 이렇게 어린 생명을 구하려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애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웃었다.
다니엘기도회 운영팀장 주성하 목사는 “해마다 21일 간의 다니엘기도회를 진행하고 나면 스물 한 번의 ‘사랑의 헌금’이 모여 얼마나 큰 사랑의 강물을 만들어 내는지 체험한다”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이 한 데 모여 사랑이 필요한 곳에 쓰일 때마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도회에서 모인 ‘사랑의 헌금’은 55억여원. 다니엘기도회는 중증환자 수술비 지원, 취약계층 연탄지원, 선교사 의료비 지원, 선교사 자녀 장학금 지원, 미자립교회 예배환경 개선 등으로 사랑을 끊임 없이 흘려보냈다. 주 목사는 “이번에 수술 받은 아이티 어린이들의 심장엔 분명 한국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이식됐을 것”이라면서 “아이티 땅에서 그 사랑이 또 다른 기적의 마중물이 되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예쁘게 땋은 머리, 천진난만한 표정만 보면 여느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이들 가슴엔 나란히 수술대 위에서 얻은 자국이 남아있다. 그리고 아이의 아픔을 눈물로 끌어안은 어머니들의 가슴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새겨졌다. 게를맨(2)군의 엄마 마텔제니(28)씨는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들이 수술을 받고 회복하며 오늘이 되기까지 모든 일이 기적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이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숙소에서 매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태어나 처음 세례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며 “다니엘기도회 감싸함미다”라고 서툰 한국어로 감사를 표했다.
수술 후 회복기를 지나온 아이와 엄마들은 20일 출국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 뉴욕을 경유해 꼬박 이틀 동안 하늘길을 통과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아이티 아이들에게 ‘마마누(우리 엄마)’로 불리는 김 선교사는 아이들 하나하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기도제목을 전했다.
“한국에서 건강한 심장을 선물 받은 아이들이 아이티의 미래가 되어 받았던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겁니다. 아이티를 잊지 말아주세요. 기도로 응원해주세요.”
하남=최기영 기자 박이삭 서은정 유경진 인턴기자 ky710@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비·목·회… 목회자 3인의 어버이 사역
- “온라인 성도 제대로 품자” 온라인교회·교구가 생겼다
- 건물 팔고, 교수 내보내고, 온라인 학위로…미국 신학교들의 생존분투기
- “예수 탄생한 자리 위에 손 얹고 기도하니 벅찬 감동”
- 4050 싱글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가족’
- 차금법 피상적으로 물으니 반대 41%… 구체적 사례 알려주니 64%로 늘었다
- “우리 동네 이단, 지도로 한눈에” 교회 청년들이 뭉쳤다
- 목사님과 사모님은 대체 어떻게 만났쥐?
- [Playlist]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여러분을 위한 음악입니다
- ‘기독교에 대한 대 국민 이미지 조사’ 충격적인 결과, 한국교회 말보다 행동, 삶으로 가야해 2